고려의 건국과 경제 역사 이래 처음으로 주조화폐를 만들어 쓰다
2003-05-13  |   7,789 읽음
고려의 건국

궁예가 세운 태봉국의 후예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해 서기 676년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건국 후 700년 동안 전성기를 누렸지만 통일신라 후기로 들어와서는 왕권의 다툼, 귀족들의 정권 쟁탈전과 부정부패, 왕족들의 반란 등으로 통치체제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귀족과 사원의 승려들은 불법적으로 백성들의 토지와 재산을 강탈해 국민을 곤궁 속으로 몰아 넣었다. 재산을 빼앗긴 농민들은 유랑민이 되어 떠돌면서 신라 조정에 대한 불만을 키웠다. 그러다가 서기 889년 진성여왕 때는 재산을 몽땅 탐관오리들에게 빼앗겨 거지신세가 된 농민들이 설상가상으로 조세를 내라는 강압에 견디다 못해 폭발, 전국적인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이 틈을 타 지방의 세력가인 호족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세울 욕심으로 소유하고 있던 사병(私兵)들과 불만에 찬 농민들을 규합해 여기저기서 신라조정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반란 속에서 세력이 가장 강했던 호족인 견훤은 후백제를 세우고 백제의 재건을, 애꾸눈 궁예는 태봉국을 세워 고구려의 재건을 노려 이른바 통일신라, 후백제, 태봉국 등 후삼국시대를 맞이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경북 상주의 농민출신으로 후에 이 지방의 호족이 된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다. 체격이 크고 건장한데다가 무술이 뛰어났던 견훤은 젊은 나이에 농민봉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때 신라의 군인이 되어 서남해안을 지키다가 신라가 부패해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백제를 재건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견훤은 뜻을 이루기 위해 신라를 배반하고 그동안 키웠던 세력을 이용해 무진주(광주)와 완산주(전주)를 점령하고 서기 900년 완산주에 후백제를 세워 왕이 되었다.
궁예는 신라 제47대 헌안왕의 서자 출신이다. 후궁의 몸에서 태어나던 날 지붕 위에 상서롭지 못한 광채가 나타났다고 하여 왕이 ‘나라에 불길한 아이’라는 이유로 죽이려 하자, 하녀가 그를 구출해 도망하다가 잘못해 애꾸눈이 되고 말았다. 궁예는 그 길로 절에 들어가 승려로서 불도를 닦다가 청년이 되어 자신의 나라를 세울 야망을 품었다.
궁예는 우선 세력을 구축할 목적으로 서기 891년 죽주(경기도)에 근거지를 둔 도적의 괴수 기훤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흉폭한 기훤에 실망을 느끼고 뛰쳐나와 북원(원주)의 괴수 양길 밑으로 들어가 신임을 얻으며 세력을 키웠다. 궁예는 양길의 후원으로 강원도 일대를 장악한 후 급기야는 양길까지 죽이고 서기 901년 철원에 후고구려를 세우고 임금이 되었다. 얼마 후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바꾼 궁예는 세력이 점점 커지자 송악(개성)일대 황해도까지 차지했다. 이때 왕륭과 그의 아들 왕건이 궁예 밑으로 들어갔다. 왕건은 궁예의 대망인 고구려를 되찾기 위한 북벌과 신라정벌에 크게 활약해 궁예의 신임을 독차지했다.
왕이 된 초기 궁예는 적으로부터 빼앗은 재물을 국민에게 나누어주고 병졸들과 침식을 같이 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으나 자신의 눈을 애꾸로 만든 신라에 대한 적개심과 이로 인해 상처받은 자존심 등으로 고심했고, 이를 잊기 위해 다시 불교에 천착해 미륵이 된 후 미륵신앙을 이용해 독재정치를 펴기 시작했다. 이후 궁예는 날이 갈수록 의심이 많고 포악한 군주로 변해 많은 신하들과 왕비, 왕자는 물론 신라에서 귀순한 자들을 죽였다. 결국 궁예의 횡포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건국공신들이 들고일어나 덕망이 높은 왕건을 앞세워 1만 명의 군사로 왕궁을 포위했고, 궁예는 살기 위해 도망가다가 백성들에게 살해당하고 왕건이 왕위를 이어 받았다.

해상(海商)가문 출신의 고려 태조 왕건
왕건은 조상이 고구려민족이지만 남하해 예성강 근방의 송악에 정착했다. 해상무역으로 부호가 된 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이곳의 덕망 높은 호족으로 출세했다. 왕건은 소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해상무역과 수군훈련을 받아 상인과 군인으로서 경험을 쌓았다.
왕건은 20세 때 궁예의 세력이 송학까지 밀고 들어오자 아버지 왕륭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 이후 왕건은 중부와 서남해안 일대를 정복해 궁예로부터 신임을 크게 받으며 지위를 굳혔다. 왕건은 궁예를 위해 쉴새없이 전장을 떠돌았지만 궁예의 폭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민심은 점차 왕건에게 돌아섰다. 이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개국공신 홍유, 신승겸, 복지겸, 배현경 등이 왕건을 앞세워 궁예를 몰아내, 왕건은 42세에 왕이 되었다.
서기 918년 왕위에 오른 왕건은 국호를 태봉에서 ‘고려’로 바꾸고 태조가 되어 왕도를 철원에서 고향인 송악으로 옮겼다. 태조 왕건은 곧 신라와의 유화정책, 지방 호족들에 대한 우대정책을 펴고, 농민들의 조세를 크게 감면하고 발해의 유민들 받아들이며 불교문화를 널리 보급하는 등 선정에 힘을 쏟아 백성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왕건의 위대한 야망인 후삼국 통일에는 견훤이 걸림돌이었다. 초기에는 두 사람 사이가 우호적이었으나 호전적인 견훤이 얼마 안 가 신라를 침범하자 신라왕의 구원군 요청을 받아들이면서부터 둘 사이가 벌어졌다. 이후 여러 차례의 영토 늘리기 전투에서 밀고 밀리다가 견훤이 왕건 제위 10년째 되던 서기 927년에 신라를 침입하자 신라의 경애왕이 고려에 구원을 청했다.
견훤은 고려군보다 한발 앞서 왕도인 금성(경주)을 함락해 경애왕 등 신하와 대신들을 살해하고 왕비까지 겁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왕건은 신라를 구하기 위해 친히 1만의 대군으로 출정했으나 대구의 공산(팔공산)전투에서 견훤군에 패전해 겨우 목숨만 구해 송악으로 돌아왔다.
이후 왕건은 호족들의 도움으로 군대를 다시 정비해 서기 929년 고창군(안동)전투에서 견훤을 물리치고 승전했다. 이를 기회로 왕건은 동해안 강릉~울산 일대에 있던 110개 성을 귀속해 세력을 크게 키웠다. 이어 견훤의 폭정 아래 꼭두각시노릇을 하며 겨우 연명하던 신라는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서기 935년에 고려로 귀순했고, 이에 따라 왕건은 후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한편 견훤은 왕자들간에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분열이 일어나 세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견훤이 총명한 넷째 아들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하자 위의 신검, 용검, 양검 세 왕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 절에 감금하고 금강을 살해해 버렸다. 얼마 후 목숨의 위험을 느낀 견훤은 금산사에서 도망 나와 왕건에게 귀순했다. 반역한 자식들을 없애달라는 견훤의 청을 받고 왕건은 군대를 이끌고 경북 선산군의 일리천 전투에서 신검의 군대를 물리쳐 서기 936년 드디어 후삼국을 통일한 뒤 6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태조 왕건이 사라진 이후 고려는 문종까지 160년간 호족중심의 중앙집권체제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발전시키며 독창적인 번성기를 이루었다. 불교를 적극 도입해 불교문화를 꽃피웠고, 유교를 받아들여 사회의 기강을 바로 잡으면서 과거제도를 시행해 초기 무신정치에서 점차 문신정치를 펴나갔다. 그러나 문종 이후부터 여러 임금들이 나약하고 놀기 좋아하는 퇴폐적인 성향으로 변하자 왕권의 다툼, 권문 세도가들의 정권쟁탈을 위한 반란, 외척세력의 난무 등으로 정치가 혼란해졌고 문종 이후 집권자인 문신들로부터 괄세를 받던 무신들이 정권을 쟁탈하는 등 안으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이렇게 혼란한 국내의 정치상황 속에서 성종 12년인 서기 993년부터 차례로 거란, 몽골, 일본해적인 왜구들이 계속 침입해 밖으로도 고통을 당했다. 특히 몽골이 후에 세운 원나라는 고종 18년(1231년)부터 40년간 고려를 침략하면서 갖은 횡포를 부려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국운이 기울자 최영, 이인임 등 강경한 혁명파 장군들의 세력을 업고 당대의 명궁 이성계 장군이 부패한 왕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아, 고려는 34대 475년만인 서기 1392년에 사라지고 조선이 그 뒤를 잇게 된다.
고려의 경제
고려의 국토는 함경남도와 평안북도 지역을 북쪽 경계로 하는 한반도 전부였다. 따라서 중부 이북은 산악지역이라 경제적 가치가 없었고 중·남부에 넓은 평야가 있어 이를 중심으로 농업이 발달했다. 삼면이 바다지만 수산업은 그리 발달하지 못했고 대신 바닷길을 개척해 중국 등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해외 무역을 활발히 했다.
나라의 살림을 운영하기 위해 거두어들이는 세금은 주로 곡물로서 조세라 했고 이를 위해 토지와 농업제도가 잘 발달했다. 다음으로 경제를 뒷받침했던 것은 상업이다. 상업은 국내의 시장보다 해외 여러 나라와 장사하는 무역이 활발했다. 고려의 발전한 항해술과 조선술을 이용해 중국,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베트남, 태국, 또는 멀리 인도와 아라비아까지 왕래했다.
무역 등 상업의 발전으로 역사 이래 처음으로 고려는 쇠 화폐를 만들어 쓰게 되었다. 고려가 처음으로 쓴 화폐는 지폐가 아니라 쇠로 만든 주조화폐로서, 주로 국내 상업에 쓰였다. 이밖에 귀족 이상 상류층이 필요한 생활용품을 만드는 수공업과 배를 만드는 조선업도 매우 발달했다.

농업
고려는 함경도와 강원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땅이 논과 밭을 만들 수 있는 경작지로서 농업이 발달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곡물을 재배할 수 있는 전국 농토의 크기는 50만 결이었다. 1결은 쌀 20석을 생산할 수 있는 면적으로, 연간 1천만 석의 곡물을 생산할 수 있는 넓은 농토다.
따라서 고려의 경제는 농업위주였고, 국가를 운영하는 세금도 곡물로 거두어들여 관리들의 녹봉은 물론 국가 기관을 운영하는 비용도 곡물로 썼다. 이렇게 국가의 경제가 농업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업을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전시과(田柴科)라는 토지제도가 생겨났다. 녹과전 또는 과전법이라고 불렸던 전시과는 귀족이나 관리들 또는 군인들처럼 나라를 위해 일하는 대가로 주는 급여인데, 각자의 지위와 충성 정도에 따라 응분의 농토나 산을 녹봉으로 나누어주는 제도다.
토지제도의 또 한가지로 수조권이라는 것이 있었다. 국가가 세금으로 농민들로부터 수확량의 1/10을 거두어들이는 권리를 귀족이나 관리들에게 위임하는 제도다. 이 제도는 세도가들이 갖는 특권으로서, 귀족이나 관료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착취하는 수단으로 사용해 농민들을 괴롭혔다.
수조권 때문에 고려 때부터 농장이 많이 생겨났다. 수조권을 국가로부터 위임받는 왕족, 귀족, 관료나 사원이 농민들로부터 농토를 강제 매입하거나 곡물을 농민에게 빌려주고 높은 이자로 곡물을 받아내는 고리대곡, 농민을 동원해 강제로 개간시켜 착복하거나 세금을 내지 못하는 농민의 토지 몰수 등 악랄한 방법으로 토지를 넓혀 만든 농장들이었다.
이외에도 농민을 괴롭힌 것은 절이었다. 국가의 불교 보호정책으로 수조권을 가진 사원들이 절에 시주한다는 명목으로 신자나 농민들의 땅을 강제로 탈취해 재산을 늘려 대지주가 되곤 했다. 이런 토지제도를 악용한 권력층의 만행 때문에 서민들은 계속 빈곤을 면치 못했고, 세도가들은 부를 축적해 빈부의 차가 심했다.

상업
고려의 상업은 수도인 개경을 중심으로 해안도시와 지방의 교통요지에서 성행했다. 궁궐의 귀족과 관청의 관리 등 상류층의 수요품과 생활용품을 우선 공급하고, 백성들 사이에 물물교환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전했다. 고려의 상업형태는 크게 국내의 도시상업과 지방상업, 그리고 해외 무역으로 나뉜다.
왕이 있는 개경을 중심으로 대도시에는 연립 점포로 형성된 시전상업이 발달했다. 특히 개경의 번화가인 광화문 거리에는 수많은 점포를 가진 상설시장이 열려 궁궐과 관청의 왕족이나 귀족들이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면서 나라에서 조세로 거두어들여 사용하고 남은 잉여품들을 판매하는 어용상업이 번창했다고 <고려원경>에 기록되어 있다.
지방에는 교통요지마다 시장이 생겨 주변 농어민들이 곡물이나 옷감 등 생산품을 화폐로 거래하거나 물물교환했고, 이들 지방시장은 대개 5, 6일마다 한 번씩 열렸다. 특히 지방을 중심으로 이 시장 저 시장을 다니며 물품을 사고 판매하는 보부상상업과 강이나 하천을 통해 배를 타고 다니며 장사하는 선상(船商)상업이 고려 때부터 발달했다.
이런 행상상업(行商商業)에서 거래규모나 상품운반규모가 컸던 쪽은 선상이었다. 배를 이용하기 때문에 등짐이나 조랑말로 운반하는 보부상보다 많은 상품을 운반할 수 있어 돈도 훨씬 많이 벌었다. 고려 때 선상의 규모가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은 1983년 완도 앞바다에서 발굴된 해저 유물선이 증명하고 있다. 이 배에서는 청자 등 상품이 3만여 점이나 발견되어 고려시대 선상들의 거래 규모를 짐작케 한다.
해외 무역은 조선시대 중엽 이전까지 어느 나라보다 활발했다. 조선술과 항해기술의 발달로 개경을 중심으로 서·남해안 도시에서 송나라·일본·요나라·금나라 멀리는 대식국(아라비아)·인도까지 활발하게 교역했다. 이렇듯 고려가 해외무역을 활발히 할 수 있었던 것은 태조 왕건의 뛰어난 해상무역 경험과 해전기술에다 많은 선박까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건은 태조로 등극한 이후 이런 해상 능력을 이용해 백제의 최대 국제항구인 전남 영상강변의 나주를 함락하고 영산강 수로를 장악해 고려의 무역이 해외로 활발하게 뻗어나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에 따라 고려는 중기 이후 동아시아의 해상권을 장악했고 한국 역사상 마지막 해상 왕국으로 부상했다.
고려의 해외 교역은 주로 왕실과 귀족 등 상류층을 위한 생활용품과 사치품 등을 수입해 공급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고려는 특히 송나라와 무역을 활발하게 했다. 현종 때부터 260년간 무역을 위해 송나라를 왕래한 회수는 120여 회이고, 송나라 상인 5천여 명이 고려에 입국했다. 고려의 최대 국제항구는 개경 근방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였다. 이 항구가 대외무역 쪽으로 얼마나 번창했던지, 고려의 대학자이며 문신인 이규보는 그의 저서 <동국이상국집>에서 ‘조수가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배가 꼬리를 연이었다. 아침에 벽란도를 떠나면 한낮이 채 못되어 남방의 하늘로 들어가는구나’라고 했다.

주조화폐
고려는 상업의 발달과 함께 역사 이래 처음으로 주조화폐를 만들어 상업에 이용했다. 고려가 만들어 사용한 첫 화폐는 쇠로 만든 둥근 철전으로, 서기 996년 성종 15년부터 앞면은 ‘건원중보’, 뒷면은 ‘동국’이라는 글자를 새긴 주화를 썼고, 중국 당나라의 주화와 같다고 하여 얼마 후에는 이름을 ‘동국중보’로 고쳐 사용했다. 초기에는 주로 도시에서 썼고 지방에서는 여전히 쌀과 옷감을 화폐 대용으로 쓰다가 본격적으로 주화를 쓰기 시작한 것은 서기 1097년 숙종2년부터다. 이때 조정에는 주전관이라는 돈 만드는 부서가 설치되었고 은으로 만든 `은병` 돈을 만들어냈다. 고려의 지형을 본떠 만든, 쌀 15섬의 가치를 가진 8가지 주화가 쓰였지만 서민들은 사용할 수 없을 만큼 큰돈이어서 주로 귀족들의 축재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수공업
고려의 수공업은 농업만큼 발달하지 못했지만 주로 대도시를 중심으로 왕족이나 귀족 또는 관청에서 필요한 가공품을 만들기 위해 이루어졌고, 상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고려의 수공업은 크게 관청수공업, 소수공업, 사원수공업, 일반수공업으로 나뉜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관청수공업이다. 이는 다시 조정과 왕족 또는 귀족들이 필요한 무기, 생활도구, 사치품, 수레, 기구 등 관수품을 만들어내는 중앙관청수공업과 지방의 행정기관이 있는 도시에서 궁궐용 공물과 지방관청이나 관리들이 필요한 가공품을 만드는 지방관청수공업으로 나뉘었다. 지방관청수공업은 다시 금기방, 잡직방, 갑방 등으로 세분화되었고, 중앙관청수공업보다 규모가 작았으며 무기 등 중요한 가공품은 만들 수 없었다.
중앙관청수공업은 개경의 중앙관청 내에 설치되어 각 전문분야별로 14개의 소수공업관청이 있었다. 이들 14개 부서에서는 군수품과 국가행사에 필요한 물품 또는 왕족과 귀족들의 옷·장신구 같은 필수품, 사치품들을 주로 만들었다.
관청수공업에는 나라에서 최고의 분야별 전문기술을 가진 공장들이 소속되어 있었고, 공장들은 기능별로 세분화되어 각자 특기에 맞는 물건들을 만들어냈다. 특히 철분을 함유한 청록색 또는 담황색 유약을 입힌 고려의 청자는 세계적인 자기예술품으로 유명하다. 청자는 원래 중국의 은나라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 당과 송나라 때 매우 발달했고, 우리나라에는 고려 초기에 제조기술이 들어와 고유의 자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독창적인 기술과 갖가지 형태의 무늬로, 고려청자는 세계적인 예술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청자 중에서 자기에 자개를 파묻어 무늬를 낸 12세기 후의 상감청자를 최고품으로 치는데, 이 청자들은 상류층 귀족들이 주로 썼고 무역상품으로 많이 거래되었다.
소수공업은 수공품을 만들 수 있는 원료, 즉 철·금·은·동·종이·기와·소금 등의 소재를 만드는 분야였다. 철소, 금소, 은소, 동소, 염소, 와소, 탄소 등 전국에 분포된 생산지에 공장을 세워 만들어낸 소재들을 중앙정부와 지방관청에 납품하고, 남은 물건들은 시장을 통해 백성에게 판매했다.
원수공업으로 불리기도 하는 사원수공업은 절에서 필요한 물건을 승려나 신도들이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주로 옷감, 술, 기와, 소금 등을 생산해 절에서 쓰고 잉여품을 일반백성들에게 팔았다. 고려 중기 이후에는 사원공업이 왕성해져 지방 시장을 거의 독점한 때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일반수공업은 가내수공업이라고도 한다. 일반인들이 농한기나 여가마다 옷감, 약제, 건어물, 육포, 가죽 등 비교적 만들기 쉬운 생활품을 만들어 관청이나 상류층에 공급하거나 시장을 통해 판매했다.
< 저작권자 - (주)자동차생활, 무단전재 - 배포금지 >
개경 벽란도 항구의 국제 무역상들고려 최대의 명절인 팔관회. 바퀴 모양 등대와 배 모양의 가장수레가 눈길을 끈다발석차로 고려성을 공격하는 몽골군고려 불교의 최대 국보인 팔만대장경을 운송하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