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도로와 해상교통 뛰어난 조선기술 바탕으로 주변국과 교류
2003-02-07  |   12,744 읽음
한반도 나라간 도로와 봉수 통신법
백제는 국내 도로망의 발전과 함께 신라·고구려·가야로 가는 국제도로도 개척했다. 고구려로 가는 길은 북쪽 한성에서 평양으로 이어졌고, 신라로 가는 길은 공주에서 보은지방을 거쳐 소백산맥을 넘어 상주를 지나 경주로 향했다. 가야로 가는 길은 보은에서 상주→선산→왜관→성주→고령을 거쳤다.

이런 광범위한 도로망에는 수많은 다리도 함께 건설되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동성왕 20년(498) 웅진교(공주)를 건설했다는 기록이 있다.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 다리는 공주를 거쳐 흐르는 금강에 놓인 것으로서, 전북과 충남의 도로를 연결한 다리다. 이것만 봐도 백제가 도로 건설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잘 알 수 있다. 또 금강처럼 큰 강에 다리를 놓았다는 것으로써 나머지 크고 작은 강에도 다리를 놓았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넓고 큰 금강에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많은 백성들을 동원한 엄청난 토목공사였을 것이다. 이처럼 큰 공사를 시행한 목적은 마한 때부터 발달되기 시작한 서남부의 교통망을 잇고자 함이다. 이 웅진교를 통해 남북이 편리하게 이어졌기 때문이다.

백제의 도로가 발달됐음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게 패하여 망한 직후의 기록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편 기록을 보자. 의자왕 20년, 즉 백제가 멸망했던 서기 660년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가 정복한 백제 땅에 주둔하여 전후 수습을 했다. 그 대목에서 `촌락을 다스리며 관장을 두고 도로를 통하게 하고 교량을 세우고 저수지를 복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전쟁 때문에 막혔던 여러 도로를 다시 개통하고 부서진 다리들을 복구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도로와 다리가 전국에 널리 깔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로교통과 더불어 고대의 통신법인 봉화제도도 일찌감치 발달했던 듯하다. 일본 <고사기>에는 백제에서 봉수가 운영되었던 지명에다 거의 봉(奉)자를 붙여놓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편에도 관련 기록이 있다. 온조왕 10년(BC 9)에 북쪽의 말갈족이 침입했다. 이에 왕이 정예병 100명을 거느리고 봉수의 신호를 받고 봉현(봉수대가 있는 중요한 지점)으로 나아가 적을 격파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를 보면 백제가 기원전인 백제 초기부터 요긴한 통신 기술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전국에 많은 봉현을 두고 이를 이용한 봉화법으로 외적 침입 같은 소식을 임금에게 급히 전할 수 있었다.

큰 강을 이용한 내륙 수상교통의 발전
백제의 전성기는 4세기다. 한반도 남서부의 넓은 평지를 차지할 만큼 국토가 가장 넓었다. 임진강·한강·금강·영산강·섬진강 등 넓고 긴 강들이 고구려 신라보다 많아 화물을 내륙 수도나 무역을 위해 해안으로 운반하는데 이 강들을 이용했고, 그만큼 수상교통이 발달했다. 내륙의 수상교통 발달은 백제가 서남해를 통해 탐라국(제주도)·일본·중국과 해상 교역을 활발히 할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내륙의 수상교통발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나 유물은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사기에 단편적으로 나타난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중 백제본기 무왕 편을 보면 무왕 35년 2월 부여의 금강 근처에 왕흥사가 낙성되었는데, ‘금강의 지류인 강수변에 건축한 이 절은 풍광이 장엄하고 미려하여 왕은 수시로 배를 타고 절을 찾아 참배했다. 3월에는 궁궐 남쪽에 연못을 파고 금강의 물을 20리나 끌어들었으며 사방 못 언덕과 물길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왕은 육로보다 오히려 수로교통을 편하게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용선(임금의 전용배)을 띄워 운하와 금강을 통해 자주 왕래했던 것이다. 또 하나, 수로 발전에 큰 역할을 한 운하의 건설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무왕은 금강과 궁궐 사이에 20리나 되는 긴 운하를 파 수로교통을 편리하게 했다.

백제본기에는 무왕 39년 3월에 궁녀들과 함께 연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내륙수상교통이 상당히 발달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백제는 세 번의 천도를 전부 강변으로 했다. 한강변의 위례성과 금강변의 공주·부여 모두 수로교통을 이용하기가 쉬운 지역이다. 그만큼 백제는 수심이 깊고 넓은 강들을 교통에 이용하는 것이 육로교통보다 빠르고 편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해상교통을 이용해 해외로 가장 먼저 진출하다
백제사람들은 신라보다 훨씬 먼저 배를 타고 황해와 남해를 건너 중국과 일본으로 진출했다. 백제는 육지를 통해서 중국과 문화, 경제를 교류하려 했으나 고구려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따라서 일찍부터 서해안과 내륙의 큰 강에서 익힌 수상교통기술을 바탕 삼아 1세기경에 백제의 상인들과 유민들이 서해를 건너 상해 앞바다에 있는 주산군도로 진출해 중국으로 드나들었고, 제11대 비류왕(304∼343) 때는 본격적으로 노·키·돛이 달린 해양선을 타고 주산군도로 대거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백제인들은 이렇게 주산군도를 거점으로 정하고 백제와 중국 사이를 왕래하는 황해 교통로를 개척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372년부터 621년까지 서해를 건너 중국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조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백제가 육로를 이용하지 않고 바닷길을 택한 것은 고구려가 육로교통을 막았기 때문이다. 제21대 개로왕 18년(472)에는 고구려의 침공을 막기 위해 원군을 청하러 북위(北魏)로 사신을 보낼 때도 고구려가 막아 육로로 가지 못하고 서해를 건너갔다는 기록도 있다. 더불어 백제가 일찍부터 바닷길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항해술과 해양선을 만드는 조선기술이 아울러 발달했기 때문이다.

일본과의 해상교통도 일찍 개척한 듯하다. 백제의 박사였던 왕인은 일본 천황의 초빙으로 서기 285년 떼배를 만들어 도자기와 철공 기술자를 태우고 천자문 1권, 논어 10권을 가지고 건너가 천황 태자의 사부로 일본에 살면서 도자기 등 백제문화를 전달했다.

당시 왕인박사가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갔던 떼배인 `티우`는 고증에 의하면 직경 30cm의 삼나무 11개를 엮어 만든 길이 약 7m에 너비 약 4m, 높이 1.5m에 역시 나무로 엮은 평상을 위에 설치하고, 너비 3m에 높이가 3.3m인 황포돛 1개를 달아 노를 저어 가는 뗏목배였다. 왕인박사는 이 배를 타고 전남 영암 대불항 근처에서 출발하여 완도-보길도-고흥 앞바다를 지나 대마도 남단을 거쳐 일본 큐슈 연안으로 들어가 후쿠오카 남쪽 가라쓰 항에 상륙했을 것으로 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그로부터 1716년이 지난 2001년 봄, 고대 항해 연구팀은 왕인 박사의 떼배를 재현시켜 백제시대에 건너갔던 해로를 따라 7일만에 일본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백제는 당시 3국 중 제일 먼저 일본·중국과 해로교통을 개척했고 돛을 사용한 해양선 제작기술과 조류·바람을 이용하는 항해술이 매우 발달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노와 키, 돛과 나침반을 처음 사용
백제가 일찍부터 바다교통을 개척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항해술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이는 왕인 박사가 3세기말에 떼배를 이용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엔닌 일기에는 ‘백제의 해민(海民)들은 지리지식으로 방향과 거리를 계산해 항해하는 지리항법, 밤에는 별을 보고 방향을 잡는 관측성항해법, 흐린 날 지남부침(指南浮針)이라는 나침반을 이용하는 항해법으로 바다를 건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항해술에 익숙한 항해기술자를 암해자(暗海者)라 불렀는데, 백제 사기에서는 암해자에 대한 기록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나 같은 시대 신라의 배에 암해자가 많았던 것을 보면 해상진출이 신라보다 빠른 백제에도 이런 전문항해사가 많았고 국가가 적극 양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명나라 사기 <동서양고> 중 범례조를 보면, 나침반은 원래 중국에서 발명되었으나 이를 선박항해용으로 사용한 것은 백제의 해민들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인들은 나침반을 이용하는 ‘침경항복’이라는 새로운 항해술을 개발해 이용했다. 이것이 바로, 방향을 잡는 ‘곤신침(坤申針)’과 거리를 계산하는 ‘갱’, 수심을 재는 ‘탁’이라는 항법이라고 중국고사기인

<무비지> 중 정화항해도(鄭和航海圖)와 엔닌의 일기는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해민들은 노와 키 그리고 돛 달린 바닷길 전용 해양선을 1세기 중엽부터 만들어 탔던 듯하다. 백제의 해양선은 중국의 배와 달랐다. 우선 노와 키가 다르다. 중국의 배는 노를 당기는 반동으로 물을 밀어 가기 때문에 큰 힘이 필요해 배 양쪽에 많은 노공(櫓工)이 필요했다. 마치 로마시대 갤리선과 비슷한 해양선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노는 도 또는 즙이라 하여 사람의 힘이 많이 필요한 비능률적인 도선이었다. 반면 백제의 노는 끝을 스크루형으로 회전시켜 물을 저어 가는 능률적이고 과학적인 노선이어서 사람의 힘이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배의 방향을 잡는 키 역시 달랐다. 백제의 것은 배의 뒤꽁무니에 고정시켜 좌우로 회전하는 전용키였지만 중국의 키는 노인 도를 사용하거나 배 한쪽의 도들을 쉬게 하여 방향을 틀었다. 이처럼 백제의 배는 바다를 건너기에 알맞은 순수 해양선이지만 중국의 배는 주로 양자강 같은 중국대륙 내 여러 큰 강에서 사용하는 도강선이라, 속도가 느리고 무거워 바다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아 백제의 해양선을 따라 잡지 못했다.

백제의 해양선이 중국의 도선보다 훌륭했음을 입증하는 기록이 중국의 <삼국지>에 있다. 오 나라 손 권이 왕위에 오르기 직전인 서기 219년 조조에 쫓긴 유비는 제갈량이 세운 중국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갖는다는 천하삼분정책에 따라 촉 나라로 들어가 왕이 되었고, 이때 관운장은 촉 나라 입구인 장강(양자강) 연안에 군사를 배치하고 봉수를 세워 수비를 철저히 했다.

그러자 오 나라 손 권의 부하 장수였던 여몽이 병사를 숨긴 배를 ‘백의로 하여금 노를 젓게 하여(使白衣搖櫓)` 촉 나라 양자강변 수비진으로 재빨리 접근, 척후병들을 제거하고 방심하던 관운장을 생포했다. 여기서 백의는 백제인을, 노를 젓게 한다는 뜻의 요노(搖櫓)는 백제의 배를 젓게 했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 대목에서 여몽이 백제의 해양선을 이용한 이유가 중국의 배보다 빨랐기 때문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백제의 해양선은 스크루형뿐만 아니라 방향을 잡는 키까지 사용했다. 그 증거는 중국의 고사기인 설문해자(서기 100년), 삼국지(219)에 나온 전쟁 기록, 북송 때(982)에 저술된 태평어람 중 주부 편 즙조, 유희가 쓴 <석명> 중 석선, 6세기경에 쓰인 고야 왕의 <옥편> 등에 나타나 있다. 특히 삼국지의 전쟁기록을 보면 스크루형 노를 젓는 기술에서 백제인이 중국인보다 뛰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수로왕의 허왕비가 타고 온 ‘돛 달린 배’
김해가야를 서기 42년에 건국한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은 인도 여자라 했다. 그런데 최근 사학자인 김성호 박사는 허황후가 인도에서 온 여자가 아닌 백제 여인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유는 가냘픈 여자의 몸으로 장장 1만km의 바닷길과 육지를 거치는 죽음의 대모험을 감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인도의 아유타국 공주라 했는데 원래 이름이 아요디아인 아유타국은 기원전 5∼6세기 경 인도의 16개 소국 중 하나로, 허황후가 수로왕에게 시집 온 때는 기원 후 48년이라는 점, 그리고 이름이 백제나 중국인 이름과 비슷하다는 점들 때문이다. 김성호 박사는 허황후를 상해 앞 주산군도의 보타도 출신 백제 여인으로 보고 있다.

허황후가 타고 김해로 온 배는 붉은 빛깔의 돛을 단 괘비범(卦緋帆)이고, 가지고 온 선물은 중국 한나라에서 만든 한사잡물(漢肆雜物)이며, 이 배는 키잡이인 숭공(嵩工)과 노잡이인 즙사(楫師) 등 15명이 몰았다는 기록이 가락국기와 삼국유사에 있다. 또 당시 중국에서 사용되던 돈인 ‘화천’이 김해지역에서 출토된 것을 보아도 중국 선박이나 주산군도의 백제 선박이 이미 김해를 드나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중국의 선박은 돛이 없는 도형선 이었으므로, 1세기 중엽에 이미 돛을 사용한 배는 백제의 해양선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증거들로 보아 허황후가 타고 온 배는 백제의 돛 달린 노형 해양선인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뛰어난 조선기술과 배의 형태
백제는 초기부터 바다로 진출한 만큼 이에 따른 조선기술도 아울러 발전했다. 동성왕 20년(498) 8월에 탐라국(제주도)을 정복하기 위해 원정군을 출정시키려하자 탐라국왕이 이를 미리 알고 겁이 나 굴복했다는 것이다. 바다 가운데 있는 탐라국을 정복하려 했다면 백제는 이미 큰 군선을 건조할 수 있는 조선기술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사기(史記)에는 없지만, 중국사기에 그 증거가 남아 있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강에서 사용하는 반동형 노가 아니라 힘이 덜 들게 휘둘러 젓는 스크루형 노를 초기부터 사용하여 황해 바다의 흑조해류를 해쳐 나갈 수 있는 해양선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조선기술이 발달했다는 것은 일본 고대 문헌인 <효덕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효덕기에는 백제의 조선공들이 만든 크고 튼튼한 배를 특별히 ‘백제 배’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 배에 돛이 달리기 시작한 것은 7세기 초로 추정된다. 7세기 중반에 와서는 해양선뿐만 아니라 강에서 사용하는 도강선에도 달 만큼 돛이 일반화된 듯하다. 백제본기 중 의자왕 편을 보면 의자왕 20년(660) 6월에 부여의 왕흥사 승려들이 마치 배의 돛과 같은 것이 금강의 물을 따라 절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돛을 묘사한 기록인 셈이다.

그러면 백제 배들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한국고대사에는 백제 배의 모습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그러나 한참 후대인 중국 명나라 때 사기 <주해도>(1563), 중 경략 병조선과 <무비지>(1621) 중 군자승 전선조를 보면 중국 해안에 살던 백제유민이 만든 배에 대한 기록이 있다. 명 태조 주원장은 해금(海禁)정치를 펼쳐 중국해안에 퍼져 살던 백제유민들을 학살하거나 추방했다. 명나라 군사들은 이에 반발한 백제유민들을 강에서 사용하는 도형강선을 군선으로 삼아 격퇴하려 했지만 백제인들의 노형 해양선을 이기지 못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후 명나라는 백제인들의 노형 해양선을 빼앗아 군선으로 개조해 사용했고, 이런 백제인의 배들을 17가지 모양으로 구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바다가 얕은 장강(양자강) 이북의 황해용으로는 배 밑이 평평한 평저선을, 바다가 깊은 장강 이남의 동·남지나해용으로는 배 밑이 칼날처럼 생긴 첨저선을 썼다. 백제의 평저나 첨저선 모두 스크루형 바다용 노와 키, 돛을 사용했다.

백제의 노형 해양선은 크기가 어느 정도였을까. 안타깝게도 백제 초기의 배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당시 신라와 백제후기 시대에 사용했던 당나라 배의 크기를 토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일본의 승려 엔닌을 당에서 일본으로 귀국시킨 신라 김 진이 만든 배는 47인승, 당나라 대신 감진화상이 당의 명주에서 백제 조선기술자의 도움을 받아 건조한 배는 35인승이라는 기록들이 있는데, 이런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평균 40인이 탈 수 있는 크기로서 길이는 18m 전후(삼대실록, 879)인 것으로 추정된다. ‘큰 파도를 헤치며 달릴 수 있는 배’라는, 성능에 관한 얘기도 <속 일본 후기>(839)에 기록되어 있다. 결국 엔닌 등 사신들을 당나라에 파견할 때 사용했던 일본의 견당선도 백제선의 모방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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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소달구지백제의 봉화부여 궁남지 운하공사금강을 끌어들인 남궁지 연못왕인 박사의 떼배인 티우2세기경의 백제 해양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