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조선과 백제의 교통 백제, 국내도로와 국제도로 활발히 개척
2003-01-09  |   11,486 읽음
신라의 항해술, 일찍부터 발달
신라가 해상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항해기술이 일찍부터 발달했던 것도 한몫 했다. 신라인들은 중국과 해상교류를 시작했던 3세기 무렵부터 중국의 항해기술을 배워 신라의 해상형편에 맞도록 더욱 개발시켰던 듯하다. 이런 신라의 항해술은 당나라 시대에 이르면 당나라의 항해기술보다 훨씬 발달하여 항해술의 전성기를 이룬다. 신라의 항해술을 이해하기 전에 당나라의 항해술은 어떻게 발달했는지 살펴보면 큰 도움이 된다.

신라와 당나라는 당나라 건국 때부터 멸망 때까지(618년∼907년) 무역을 중심으로 한 경제교류, 문화교류, 나당 연합군의 군사교류, 사신교류 등으로 긴밀한 관계를 이어왔다. 따라서 항해술·조선기술·선단운영술을 발전시키는 데 당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장보고는 소년 시절에 당으로 들어가 청년이 된 뒤 당나라 장군이 되기까지 당에서 오래 살았는데, 이때 발달된 항해술을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고사기(古史記)인 <해도지>(770년), <해조부>(850), <해조론>(900) 등에 따르면 당은 정확한 해류의 파악과 이를 이용한 항해술이 매우 발달했다. 해마다 4월에서 7월까지 중국 동해안에는 서남 계절풍이 불었는데, 바로 그 계절풍을 타고 일본에서 당으로 갔다.

일본 고대 역사를 기록한 가장 오래된 책인 <고사기>((古事記, 712)를 보면 한 신라 왕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에 돛에 관한 설화가 있다. 6세기 초에 신라 왕자인 천일모(天日矛)는 아름답고 요리 잘하는 아내가 일본으로 도망가자 그녀를 찾아 오사카부근 니나와로 건너가려 했다. 그런데, 거센 파도가 가로막아 더 갈 수 없게 되자 할 수 없이 돌아오다가 일본의 다지마라는 곳에 머무르면서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다. 왕자 천일모가 일본으로 가지고 간 보물은 옥진보 두 개, 파도를 일으키는 천, 파도를 가라앉히는 천, 바람을 일으키는 천, 바람을 잠재우는 천오경과 변경이라는 거울 두 개 해서 모두 여덟 가지였다. 여기서 각종 천은 항해에 필요한 돛을 만드는 재료를 뜻하며, 거울과 보물 두 개는 항해용 도구로 보면 된다. 따라서 신라의 항해술이 일찍부터 일본에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배는 이미 6세기 초부터 강이나 연안 해로에서 돛을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신라와 당이 돛 달린 해선으로 본격적인 항해를 한 것을 8세기 초로 보고 있다. 중국 고사기인 <태평어람>에는 조병이라는 무역거상 이야기가 나오는데, 돛을 펴고 배 중앙에 앉아 큰 고함으로 바림을 불러 유유히 바다를 건넜다고 전한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연대를 추정한 듯하다.

바람과 돛만 있다고 해서 넓은 바다를 항해할 수는 없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바로 뱃길을 잘 아는 것이다. 당나라는 실용적인 항해도를 일찍부터 만들어 썼다. 군부 내에 직방랑중(織方郞中)이라는 항해도 전문 작성 부서까지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대의 명재상인 매탐(賣耽)이 만든 항해도인 ‘등주해행입고려발해도(登州海行入高麗渤海道)’에 당에서 한반도 서해로 가는 ‘해내화이(海內華夷)’라는 뱃길이 그려져 있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구름 낀 날이나 별 없는 어두운 밤에도 항해할 수 있도록 나침반도 만들어 이용했다. 나침반은 고대 중국의 발명품인데, 당의 나침반은 지남철 침을 이용한 것으로 기원전 2세기 한(漢)나라 때부터 쓰던 관측성술, 즉 별을 관측하는 기술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이렇게 중국과 오래 교류하면서 신라에는 항해도, 즉 뱃길을 잘 알고 나침반을 능숙하게 다루는 항해사인 ‘암해자(暗海者)’가 많았다. 그 증거로 당에 들어갔던 일본 사람 엔닌(園仁)이 일본으로 돌아갈 때 귀국선단(船團)의 배 아홉 척에 신라인 암해자 60명을 분승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신라는 항해 기술의 기본을 당에서 배워 발달시킨 것으로 보인다.

신라인들은 3세기부터 바다를 거쳐 중국으로 내왕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해선이었다. 초기에는 육지 연안을 따라 내왕하는 연안 해로였기 때문에 주로 노를 젓는 배를 썼지만 다양한 통로로 바다를 건너는 해로교통이 발달하던 4세기에 들어서면서 신라의 배 만드는 기술도 점차 발달했다. 그래서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면 당나라의 조선기술보다 크게 앞섰다.

앞선 조선기술로 주변국에 영향
또한 신라는 개국 초기부터 일본의 침략을 자주 받아 이를 막느라 수군(水軍)과 배가 꼭 필요했다. 그래서 특히 군선, 즉 바다에서 싸울 수 있는 전투용 배를 만드는 기술도 함께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14대 유례왕 6년(289)과 22대 자비왕 10년에 군선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또 일본에 배 만드는 기술자를 파견한 기록도 있다. 4세기 무렵 일본의 배는 기둥과 대들보를 줄로 엮어 만든 원시적인 떼배여서 신라왕이 조선기술자를 파견했다고 한다. 이때 신라에서는 목판을 붙일 때에 나무못이나 쇠못을 쓰지 않고 요철로 파내어 결합시키는 기술이 이미 발달했다.

<일본서기> 오진천황 사기(史記)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무코(武庫)의 수문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배 500척이 모여 있는데, 신라의 사신이 타고 온 배에서 불이 크게 번져 많은 배를 불태웠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왕은 유능한 조선기술자를 보내어 배를 만들었다. 이 사람이 곧 이나베 가문의 시조인 저명부(猪明部)다.”

기록상으로는 저명부가 일본에 건너간 신라의 첫 조선기술자인 셈이다. 오사카만 무코강 입구에서 불에 탄 신라사신의 배를 다시 만들어주고 저명부는 그대로 무코강 입구에 눌러 앉았다. 그런 뒤 그곳에 조선소를 세워 일본에서 배를 만들면서 조선기술을 전했던 것이다. 뒤에 이나베라는 일본 이름으로 바꾼 저명부의 자손들은 이세만(灣) 연안의 나고야로 옮겨 조선 기지를 건설했다. 그리고 일본인들에게 신라의 배 건조기술을 가르치는 한편, 일본사신들이 당나라로 갈 때 타던 견당선(遣唐船)도 만들었다.

이나베 가문이 일본에서 만든 배는 신라 배와 구조나 크기가 같았다는 것이 증명된 일이 있다. 이세만 연안지방의 미야자키현 사이토바루 고분에서 `하나와` 라는 일본 배가 출토된 게 그것이다. 100명쯤 태울 수 있는 이 배는 5세기 무렵의 대형 구조선으로서 노를 꽂는 구멍이 12개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와 배와 매우 닮은 배 모양 토기가 경주에서 발굴되기도 해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6세기에 등장한 일본의 견당선도 하나와 배에서 발전된 모습으로서, 신라조선기술로 만든 배임을 알 수 있다.

문무왕 18년에 중국·일본과 해상교류 늘어
당 거주 신라 해상민 조선기술 특히 뛰어나


신라의 뛰어난 조선기술은 배와 관계 깊은 여러 역사적 사건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제22대 지증왕 6년(505)에는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군선(軍船)을 제도화시켜 수군을 강화했다. 또 23대 법흥왕 4년(517)에는 이 군선단을 지금의 국방부 격인 병부(兵府)에 소속시켰다. 26대 진평왕 5년(583)에는 병부에 군선과 일반 무역선을 관리하는 선부(船府)를 설치해 수군과 일반 백성들의 해상교통을 보호하고 통제하는 데에 힘썼다. 그리고, 제29대 무열왕 7년(660)에는 왕자 법민(法敏)이 군선 100척을 이끌고 덕적도까지 출항하여 당의 수군을 환영했다는 기록도 있다.

통일신라 초기인 제30대 문무왕 18년(678)에는 중국·일본과 해상교류가 급증하여 선박이 많아졌다. 그래서 병부에 속했던 선부를 독립시켜 병부와 같은 자격을 주고 수군과 군선, 그리고 해상 무역 제도를 더욱 강화, 발전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막강한 수군과 발달된 배는 문무왕이 당나라와 동맹한 연합 수군을 이용하여 676년 통일신라를 이룩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신라의 조선기술이 발달한 동기 가운데 하나는 황해와 동지나해 연안으로 이주했던 신라 유민들의 힘도 켰다. 일본 승려 엔닌의 기행문인 <입당구법승려행기>(794∼864)와 <속일본기>를 보면 그런 기록을 살필 수 있다.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중국에는 신라 해상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양자강과 경항 대운하 등 산동반도의 항구들 주변에 자리잡고 살던 신라 해상민들은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신라인 집단촌을 열 군데나 꾸렸다. 그들이 운송·조선· 무역업·상업·제조업에 종사하여 중국에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주자 당나라 조정에서는 치외법권의 특혜를 누리도록 허락했다. 특히 양자강 어귀 유산포 항구에는 서해를 건너다니는 신라인들의 대형 해양선들이 모여들어 배의 수리업과 함께 조선업도 크게 번창했다.

당나라 거주 신라 해상민들의 조선기술은 뛰어났다. 목판 한쪽을 가늘게 깎은 ‘장부’를 다른 목판에 뚫은 구멍에 끼워 맞추는 기술, 쇠못을 깎아 만드는 기술, 방수기술이 남달랐다. 그리고, 물에서 잘 썩지 않는 녹나무 같은 특수목재로 배를 만드는 조선기술까지 선보였다. 신라인들은 이런 조선기술로 원양 항해선뿐만 아니라, 하천이나 강에서 운행하는 수운선, 전투함, 경주용 용선(龍船) 등 다양한 배를 만들었다. 중국의 고서인 <구당서>에 이런 기록이 잘 나온다. 기록을 보면 신라인이 건조한 배들이 양자강의 나루터들을 장악하고, 수만 척의 배들이 주야로 왕래하여 교역을 했다. 특히 원양 항해용 해선은 선체가 웅장하고 안정성이 뛰어나 아라비아와 일본인들이 타기 좋아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렇게 훌륭한 신라인들의 조선기술은 당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쳐 중국 배는 당나라시대에 비로소 크게 발전한 듯하다. 당나라의 동래·강주·양주·상주·항주·복건 등 주요 항구에는 신라와 당나라 사람이 만든 수많은 조선소가 있었다. 이곳에서 많은 배를 만들어 군사·운수·교역에 쓰였음이 중국 고서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당어림>(唐語林)에 따르면, 당의 태종인 이예(李豫)는 양자강변에 있는 유남도의 관찰사(도지사) 유안을 시켜 양자강 연안 양주 일대에 조선소를 열 곳이나 세웠다. 그래서 한 척에 100만 전짜리 큰 배 2천 척을 건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배 모양과 종류
1960년 양자강변에서 당나라시대의 배와 선창이 발견되었다. 길이 24m, 높이 1.4m, 너비 4.3m의 이 대형 당나라 선박은 녹나무로 만들었는데 장부 맞춤과 못박이 기술로 짜 맞춘 완벽한 방수선이었다. 또 1973년에 양자강변의 마항에서 출토된 길이 17m, 너비 2.6m의 삼나무로 만든 목선은 선실이 9개에다 돛이 하나 있는 범선이었다. 이 두 배는 신라의 조선기법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배들이 출토된 양자강변은 신라의 유민들이 살던 곳으로, 당나라·일본·신라인들의 출입이 잦던 항구들이 집중해 있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양자강변 화남도에 있는 양주와 초주 항구 근방 치외법권 지역에 모여 살던 신라인들은 해상운수업과 무역이 주된 산업이었다. 따라서 이에 필요한 선박제조와 수리업이 번성했던 것은 당연했다. 그러면 신라방의 신라인들이 만든 배의 모양은 어떠했을까? 엔닌의 일기나 당나라 고서인 <구당서> 기록에 잘 설명되어 있다. 범선은 갑판이 없으며 중앙에 돛과 노와 키가 있는 배다. 관선(官船)은 갑판이 있으며 문과 창이 달린 방 하나에 주위에는 난간이 설치되었고 갑판과 선창을 오르내릴 수 있도록 사다리가 있었다. 방인 누각 말고는 갑판에 천막을 쳤으며, 배의 조립은 나무판재를 구부려 못으로 결합했다. 또 무거운 닻을 끌어올리고 내리는 승하강장치가 달려 있고 스무 폭쯤 되는 천으로 만든 큰 돛을 쓰는 대형 해선이었다.

이러한 신라방의 선박들은 일본 배보다 안전해서 일본사신들이나 무역상들이 즐겨 탔다. 그 증거가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담겨 있다. 이 여행기의 저자인 일본승려 엔닌이 당에서 일본으로 귀국할 때 신라 선박 9척을 신라방에서 빌려 신라 선원 60명을 태운 이야기는 앞에서도 했다. 이때 이 배를 수리하느라 양주의 신라촌에서 기사장, 목공, 선공, 철공 등 신라인 조선기술자 36명을 데려갔는데, 장보고의 도움으로 그토록 많은 배와 선원을 빌릴 수 있었다.

그러면 서기 820년대 말부터 삼국의 바다를 장악했던 해상왕 장보고의 배의 규모는 어떠했을까? 장보고의 배에 관한 확실한 기록이나 유물, 유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다만, 그 무렵 당나라와 일본 배 또는 기록을 살펴 추정해 볼 수는 있다. 장보고는 대형 군선인 누선(樓船)과 쌀 1천 석쯤을 나를 수 있는 튼튼한 화물선인 조운선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고려가 신라 말기에 쓰던 배의 구조나 크기를 그대로 이어 받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추정해 보자. 장보고가 중국·일본과 교역하자면 험한 바다를 건너다녀야 했고, 따라서 크고 튼튼한 선박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 사신이나 화물주인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선실이 갑판 위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바다를 건너다니는 해양선은 밑바닥이 칼날처럼 생긴 ‘첨저선(尖底船)’이고, 연안을 주로 다니는 해안선은 서해안의 얕은 수심에 편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밑바닥이 평평한 ‘편저선’을 이용했을 것으로 본다. 항해술이 뛰어난 장보고는 속력이 빠른 배가 필요했을 것인데, 배의 속도를 좌우하는 것은 돛의 숫자다. 따라서 두 개가 넘는 독립적 기능을 가진 대형 돛을 설치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나 역사학자들의 결론이다.

1984년 전남 완도 앞바다에서 배가 한 척 발굴되었다. 완도선이라고 부르는 이 배는 선미와 선수부가 없고 상부도 삭아 없어져 배의 남은 길이는 9m, 너비가 3.5m, 높이가 1.7m로 그다지 큰배는 아니었다. 하지만 학계는 이 배를 해안을 항해하던 장보고의 청해진 배로 보고 있다.

백제의 교통
백제의 건국과 경제
백제는 기원전 1세기 말에 졸본부여 왕인 주몽의 둘째 아들인 유리가 서울 한강 상류, 지금의 강동구 부근에 위례성을 쌓고 도읍했다. 그 뒤 한강 유역에 있던 마한을 병합하여 발전한 나라다. 뒤에 고구려와 신라의 압박 때문에 공주로 천도했다가 마지막에는 부여를 수도로 바꿨다.

백제는 전성기에 해외로 뻗어나가 해상무역으로 경제력을 키웠고, 특히 일본에 우수한 도기·조선·철기·한문 등의 백제문화를 전했다. 백제는 일본인들을 문화적으로 계몽시켜 일본 발전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로 일찍이 서해와 남해를 건너 중국·남중국·일본과 교역을 함으로써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해상무역을 장악했다. 백제는 32대 678년의 역사를 마지막으로 660년 나당연합군에 멸망, 통일 신라에 흡수되었다.

백제는 초기부터 농업이 발달했으나 곧이어 쇠로 농기구를 만드는 수공업도 발달했다. 4세기 이후에는 해안을 중심으로 철을 기반으로 한 수공업이 발달해서 각종 어구를 쇠로 만들어 어업과 염전업이 함께 발달했다.

백제의 수공업은 농기구를 중심으로 무기, 생활용품, 장식품 등 여러 부문으로 발전되었다. 백제의 수공업은 크게 관청 수공업과 민간 수공업으로 나누었다 관청 수공업은 궁내 내관(內官) 소속으로서, 최고 기술자들인 장공(匠工)들을 마부(馬府), 도부(陶府), 목부(木府)로 구분해서 배치했다. 장공들은 왕족과 귀족을 위한 생활도구와 병기, 말, 수레, 배에 필요한 부속품들을 만들었다.

관청 수공업은 내관과 외관으로 나눠 운영했다. 외관에는 사군부·사도부·사공부·사구부가 있었는데, 사공부(事工府)에서는 주로 궁궐·사찰·다리·조선·승용 수레와 달구지 제조 같은 큰 공사를 맡았다.

백제의 도로망과 다리
백제는 한성(서울)·웅진성(공주)·사비성(부여) 등 역대 수도를 중심으로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와 다리를 활발하게 건설했다. 도로가 발달한 것은 영토의 확장과 관련이 있다. 백제가 점차 영토를 넓히면서 이를 통치하기 위해 고구려가 시행하던 지방통치법인 ‘5방성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백제는 전성기에 전국을 다섯 방성으로 나눴다. 이들을 중앙에서 군사·경제적으로 통치하자면 수도에서 각 방성의 성도를 연결하는 교통로가 필수적이었다. 지방세력이 봉기할 때 중앙의 군사를 급파하여 제압하고, 각 방성의 농수산물을 수도로 편리하게 수레로 수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왕의 명령을 각 방성 수령에게 신속히 전달하는 데에도 국도가 요긴하게 쓰였다.

중앙에서 5개 방성을 군사·경제적으로 통치
광범위한 도로와 함께 수많은 다리도 건설해


백제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523∼660)와 각 방성의 거리는 60리부터 360리까지 다양했다. 중방성인 고사성(고부)는 부여에서 남으로 260리 거리였고, 동방성인 득안성(은진)은 부여에서 동남쪽으로 100리 거리였다. 가장 먼 남방성은 부여에서 남쪽으로 360리 거리인 변성(장성)이고, 다음으로 먼 서방성은 부여에서 서쪽으로 350리 거리인 도선성이었다. 가장 가까운 곳은 북방성인 웅 진성(공주)으로서, 부여에서 60리쯤 떨어졌다.

백제가 부여와 각 방성을 연결하는 도로는 물론 각 방성끼리 연결하는 지방도로도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기록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온다. 여러 강에 많은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도로가 발달했던 증거는 부여에서 발굴된 도로 유적이다. 부여 박물관 앞의 이 유적은 남북거리가 30m, 동서거리가 25m쯤 되는 교차도로로서, 달구지 두 대가 서로 비켜갈 수 있는 넓은 도로다. 그리고, 도로 양옆에는 돌을 깐 도랑도 부설되어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백제는 후기인 사비성(부여) 시대에 이르러 전국의 다섯 방성을 22담으로 더욱 세밀히 구분하고 각 담에는 왕족을 파견하며 통치했다. 이때는 5방성시대보다 도로가 더욱 발전되어 전국을 거미줄처럼 연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로 규모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나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수레 한 대쯤 달릴 수 있는 도로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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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항해용 물 나침반완도 앞 바다에서 발견된 신라의 해안선 유물경주 안압지에서 발굴한 신라의 호수배신라의 군선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부여성내의 정열된 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