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타의 미국 상륙 실패
2003-03-09  |   16,507 읽음
도요타자동차가 아직 생산회사와 판매회사로 나누어져 있던 1989년 가을, 판매회사의 사장을 하다가 그 자리를 도요다 쇼이치로(豊田章一郞)에게 넘겨주고 회장이 된 가토 세이지(加藤誠之)가 한국을 방문해 한국 자동차공업을 시찰했던 적이 있었다. 그가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 방문했을 때 필자는 공장장으로 있을 때여서 그를 안내해 공장을 골고루 보여 준 뒤, 그와 대담하는 기회를 가졌다.

현대가 미국 진출을 모색하는 중이지만 미국에 보낼 수 있는 좋은 차를 만드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고 필자가 말한 뒤, 도요타가 처음 미국에 진출할 때는 어떤 준비를 했는가를 물었다.

토요펫 크라운으로 미국 첫 진출 실패
처음 달린 고속도로에서 고장으로 멈춰


“좋은 차를 만든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도 말아요. 도요타는 1952년에 처음으로 로스앤젤레스에 2대의 견본차를 내어보냈다가 큰 창피를 당하고 말았지요. 내가 그곳으로 가서 요코하마에서 선적한 2대의 토요펫 크라운(Toyopet Crown)을 맞을 준비를 했는데(당시 그는 젊은 중역이었다), 브라스밴드 연주로 맞이하는 가운데 차가 하역되고 많은 신문기자들이 모여 사진을 찍고……. 우리는 그해의 미스 일본을 초청해 그 차와 함께 사진에 찍히도록 했는데 그것이 다음날 조간에 아주 커다랗게 실렸어요. 그것을 보는 내 가슴은 아주 뿌듯하더군요.

전시장에 온 많은 미국인들이 차 모양을 앞뒤로 살피고는 차체를 손으로 두들겨 보면서 ‘철판이 두툼해서 아주 튼튼해 보이는군’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더라고요. 그 때의 일본기술로는 얇은 철판으로 차체를 프레스할 수 없었지요. 그래도 나는 그들 모습을 보고 속으로 ‘이만하면 됐다’ 싶더군요. 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에서 차를 빨리 보여달라는 재촉이 빗발치듯이 오기도 하고 해서 나는 거기서 본사에 텔렉스로 보고서를 보냈어요. 평판이 아주 좋아 연간 1만 대 이상의 수출은 문제없을 것 같다고 말입니다.

며칠 뒤, 샌프란시스코에서 전시하기 위해 그 차 2대를 몰고 고속도로로 들어섰지 뭡니까. 당시만 해도 일본에는 고속도로가 아직 없을 때여서 그 차가 고속도로에 올라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성능도 볼 겸 액셀을 힘껏 밟았어요. 그런데 아무리 밟아도 차가 나가지 않는 겁니다. 옆으로 미국차들이 씽씽 달리면서 추월해 가기에 화가 나서 더욱 페달을 힘껏 밟고…, 그러자 얼마 가지 않아 엔진이 과열하고 차는 고장나서 서고 말았어요.”

가토 회장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옆으로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할 수 있어요? 길옆에 차 2대를 세워놓고 급히 정비사가 달라붙어 고장을 수리할 수밖에. 지나가던 미국차들이 일부러 속도를 늦추면서 모두 손가락질하며 웃는 겁니다. 겨우 고쳐서 샌프란시스코까지는 끌고 갔지만 전시회고 무엇이고 다 취소해 버리고 바로 다시 선적해 일본으로 돌아오고 말았어요. 그리고 다시 미국에 진출하기까지는 4, 5년이 더 걸렸지요.”

포니를 개발할 때는 한국에도 경부고속도로가 완성되어 있었다. 당시, 포니는 그 위에서 충분히 달려 보았으며 유럽의 시험기관에 의뢰해 충돌시험도 마친 뒤였다. 그러나 미국 시험규격이 달랐기 때문에 미국 용역회사에 의뢰해 각종 시험을 하려고 조사를 시작했을 때였다.

처음 실패 뒤에 도요타는 차를 철저하게 손질해 미국에 다시 상륙했지만 1958년에 288대, 60년에는 821대 그리고 61년이 되자 도로 576대로 감소하는 등 판매는 부진했다. 어느 미국인은 그 차를 ‘소마력, 고가격, 탱크타입’이라고 비평했다. 거기에 차 이름 Toyopet은 Toy·pet(장난감·애완동물)와 비슷해 미국인들은 그것을 비싼 노리개감은 될지 몰라도 타고 다니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차라고 낙인찍었다.

판매가가 약 2천300달러였는데 그것은 폴크스바겐 비틀 보다 600달러 비싸고 시보레와 엇비슷한 가격이었다. 그런 차가 미국에서 더 많이 팔릴 가능성은 없었다. 성능은 물론 가격 면에서도 혁신적 개선이 요구되었다.

1957년에 처음 나와 60년에 모델 체인지 된 코로나는 일본 국내에서 파격적으로 팔리게 되어 도요타는 그것으로 미국에 다시 들어가면 성공할 것이라 믿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무렵 도요타 크라운은 일본 내에서 차체에 균열이 생겨 말썽이 났으며 국민차로 개발했던 퍼블리카는 판매에 실패했다. 도요타의 기술은 신뢰를 잃어 그들이 정말로 수출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의심했다.

70년 들어 카롤라로 미국 시장 재진출
73년 오일쇼크 이후에 판매 크게 늘어


도요타에서는 에이지(豊田英二)와 그 밑에 있는 쇼이치로가 자동차 개발과 생산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계속해 돌발하는 문제를 해결해 내지 못하면 도요다 집안이 몽땅 망하고 자칫하면 일가 모두가 거지가 될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 국내에서의 이런 기술적인 시련을 하나씩 극복해 낸 도요타는 70년에 들어 코로나의 경험을 기초로 개발하여 66년에 등장시켰던 카롤라로 미국에 본격적으로 다시 진출했다. 이번에는 타이밍도 좋았다. 한때 연간 57만 대나 팔리던 폴크스바겐 비틀의 판매는 차츰 하강하기 시작했으나 그것은 미국 서해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실용적인 소형차의 맛을 알리는 역할을 충분히 해 주었다. 카롤라는 캘리포니아 사람들의 흥미를 처음부터 끌었다.

카롤라는 뒷바퀴굴림, 73마력, 수랭식 엔진인데 비해 비틀은 뒷바퀴굴림, 공랭식 50마력이었으며 2도어였다. 70년에 카롤라는 4도어형도 내놓아 같은 수의 승객이 비틀보다 더 편하게 앉을 수 있었다. 가격은 비틀보다 200달러나 쌌다.

도요타는 65년부터 미국식 광고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판매망과 애프터서비스망도 차곡차곡 넓혀갔다. 60년 말까지 도요타 브랜드가 알려지고 미국 진출을 위한 교두보가 그런 대로 확실하게 구축되어 있었다.

카롤라가 미국에 상륙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973년 겨울, 오일쇼크가 터졌다. 70년 8월에 배럴 당 1달러 80센트였던 원유가격이 74년 1월에는 11달러 65센트로 폭등했다. 그나마 주유소에 충분한 휘발유가 공급되지 않아 연료를 사기 위해 주유소마다 차들이 넘쳐나도록 늘어섰다.

미국인들에게 휘발유를 한없이 먹는 미국제 승용차가 군함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시내를 달리며 직장에 가는 데 그렇게 큰 차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연료소비량이 적고 고장이 나지 않는 소형 일본차가 훨씬 더 실용적이라는 인식이 미국인들 사이에 급격하게 퍼져 나갔다. 도요타의 판매는 73년에 32만7천 대로 치솟았다.

그때까지 빅3는 일본차를 ‘달리는 관(棺)’이라 비웃으며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그들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형차 판매가 급격하게 줄어들자 빅3도 소형차개발에 들어갔다. 하지만 실제로 개발해 보니 일본차와 경쟁하는 코스트로 만들 수 없었다. 일본차가 어떻게 그렇게 저렴한 코스트로 만들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미국 상륙에 실패했던 도요타가 피땀 흘리며 10여 년 쌓은 소형차 개발과 생산에 관한 기술축적을 빅3라 할지라도 하루아침에 획득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판매가 줄어든 빅3의 경영은 날로 어려워져 갔다. 맨 처음 크라이슬러가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빅3는 일제히 일본을 비난하고 나섰다. 그들은 일본차가 덤핑가격으로 팔고 있다, 혹은 일본주식회사가 미국을 침략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일본정부가 여러 측면에서 지원해 주기 때문에 일본 자동차는 그처럼 저렴한 가격으로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도요타는 빅3측에 자기 회사의 재정상태를 포함하는 제조공정 전체를 공개하겠다고 제안했다. GM과 포드, 크라이슬러는 전문가들을 일본에 파견해 샅샅이 조사했다. GM 조사단의 일원이 귀국해 제출한 보고서 카피 하나를 필자는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보면 그들이 생각했던 모든 것이 잘못이며 일본, 특히 도요타의 생산방식이나 해외진출방식은 미국이 한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는 특수한 것이라고 실토하고 있다. 나중에 MIT의 교수팀은 도요타를 연구해 도요타생산방식을 매스프로덕션을 앞지르는 Lean(군살 없는) 프로덕션이라고 이름지었다.

미국에 다시 진출하기 위해 도요타가 품질과 코스트 절감을 위해 그간 얼마나 고생했는가에 대해서는 그 보고서에 쓰여 있지 않았다. ‘같은 돌에 두 번 채이는 놈은 바보’라는 격언이 있다. 에이지와 쇼이치로를 필두로 하는 도요타 기술진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은 같은 실패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 고장 나지 않는 차를 목표로 전체 품질을 높이고, 그것을 사원 전체가 참여하는 개선제안으로 1엔이라도 낮은 코스트로 제조하는 아이디어를 모아 생산라인을 개선해 갔던 것이다. 그 뒤로 고속도로에서 도요타 차가 손가락질 받는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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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본격적인 미국 수출에 나선 도요타 카롤라. 73년 터진 오일쇼크를 계기로 판매가 크게 늘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