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수상교통 기원전 1만 년부터 한일간 해상 문화교류
2002-07-11  |   12,984 읽음
고조선의 수상교통은 배나 선박의 자료 또는 유물, 기록들이 거의 발견되지 않아 육상교통보다 추적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배나 선박의 이용으로 일찍부터 행상교류가 발달했던 중국과 일본을 연관해 살펴볼 수밖에 없다. 고조선은 중국과 인접해 고조선 초기부터 서로 교역을 했고, 일본과의 교류는 구석기시대인 기원전 1만 년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기원전 1만 년경인 빙하기에는 한반도와 일본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어 양국 사람들이 도보로 문물을 교류했다는 것이다. 경상남도 해안에서 출토된 구석기시대 말의 륭기문토기(隆起紋土器)와 매우 흡사한 것이 일본 쓰시마에서 발견된 점이 그 증거다.

신석기 시대로 들어와 빙하기가 끝나면서 해수가 불어나 한반도와 일본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갈라졌으나 한반도와 일본의 교류는 끊어지지 않았다. 이 같은 사실은 신석기시대의 한반도 유물인 새김무늬질 그릇(기원 전 4000∼3000년) 등이 일본 큐슈 서북부에서 발견된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신석기 이후 바다로 갈라진 한일 양국에 이런 문물교류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고조선 사람들이 해상교통을 일찍부터 개척했기 때문이다. 중국과 고조선은 육지와 강으로 연결되어 있어 육로로 교류할 수 있었지만 일본은 바다 건너 있어 해상교류, 즉 배 아니면 왕래할 수 없었다.

강이나 호수는 원시적인 통나무배나 뗏목배로 건널 수 있지만 큰 파도와 폭풍 등의 험난한 바닷길은 이런 원시적인 배로는 도저히 건널 수 없었다. 당시는 바람의 힘을 이용하는 큰배를 만들지 못했던 시대다. 고대의 기록에 의하면 돛 달린 범선을 이용한 것은 기원 후 6세기경이다. 그러면 고조선 사람들은 그 넓은 바다를 어떻게 건너 다녔을까.

해류를 이용해 바다를 건너다니다
고조선시대부터 해상교통이 활발했던 것은 해류를 이용한 일본과의 문화교류 덕분이다. 고구려 말까지 한일간 해상교통에 이용했던 배는 노를 저어 항해하는 소형 배들이었다. 이런 배로는 도저히 험한 바닷길을 왕래하기 어려웠다. 고조선 사람들이 이런 장애를 극복하고 일본을 자유롭게 다닌 것은 일찍부터 해류의 흐름을 잘 이용하는 항해법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침반에 의한 항해법을 발견하기 전이었던 당시, 고조선 사람들은 바다에서 일정하게 흐르는 해류와 섬들의 형상을 파악해 항해하는 법을 오랜 경험으로 개척했다. 여기서 일정하게 흐르는 해류란 쿠로시오라고 부르는 흑조(黑潮)난류와 한류를 말한다. 흑조는 적도에서 형성된 따뜻한 해류가 지구의 양극을 향해 흐르는 성질이 있고 한류는 양극에서 형성된 차가운 해류가 적도를 향해 흐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북위 적도에서 출발해 필리핀 동부해역→남지나해 연안→타이완의 동부해역→일본 태평양 연안의 북위 30도에서 갈라져 동쪽으로 흐르는 흑조는 다시 오키나와 섬 남쪽에서 갈라져→동지나해로 북상→류크제도의 북서쪽 바다를 지나→ 대한해협 통과→한국 동해안으로 흐르는 동한 난류와 대마도 쪽으로 흐르는 쓰시마난류, 그리고 류크제도 북서해→제주도 서쪽바다→황해로 흐르는 황해 난류 등 세 가지 흑조지류로 나누어진다. 이 흑조는 수천 년을 두고 그 범위 즉, 폭이 다소 변해왔지만 흐름은 일정하다.

류크제도 북서쪽 바다에서 한반도 서해로 북상하는 황해의 흑조난류는 중국의 황하, 난하, 요하와 한반도 서북의 압록강, 대동강, 청천강, 한강 등의 차가운 강물이 황해로 모여 이룬 저층 냉수와 충돌할 때, 일부가 이 저층 냉수군에 밀려 좌우 두 지류로 갈라져 진로를 바꾼다.

갈라진 한 지류는 중국대륙 연안으로 흘러 내려가 동지나해로 북상하는 흑조와 만나고, 나머지 오른쪽으로 진로가 바뀐 지류는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남하해 제주도 서쪽에서 대한해협으로 흐르는 흑조 난류와 만나 진로를 동으로 변경, 제주도 해협을 통과한다. 이때 또 다시 두 줄기로 나누어지는데 한 줄기는 대한 난류에 편승해 한반도 동해로 북상하고 나머지 한 줄기는 쓰시마 난류와 합해 일본의 큐슈북부로 흐른다.

한편 한반도 동북부인 시베리아 연해주 연안에서 발생한 리만 한류는 남쪽으로 흘러 한반도 동해 북부에서 북한 한류를 형성, 북상하는 동해난류와 울릉도 근해에서 만나 동쪽으로 진로를 바꾼다. 이 해류의 일부가 북상하는 쓰시마 난류와 충돌해 일본 연안으로 흐르게 된다.

고조선시대의 한일간 해상 항로
이러한 한반도 주위의 해류상황을 고조선 사람들은 일찍부터 파악해 노 젓는 작은 배나 뗏목배로 해류를 타고 한일간을 오갔다. 그러면 고조선사람들은 한반도에서 일본을 갈 때 어느 뱃길을 이용했을까.

첫째 항로는 함경도를 출발, 일본 쓰루가항에 도착하는 뱃길이다. 함경도 해안에서 배를 띄워 남하하는 북한한류를 타면 북상하는 동해난류와 만나 울릉도 쪽으로 흘러가게 된다. 여기서 다시 북상하는 쓰시마난류에 실려 일본의 쓰루가에 도착한다. 87년 초 북한의 김만철 씨 일가가 청진항에서 모터보트로 탈출했으나 공해상에서 엔진고장을 일으켜 표류한 끝에 저절로 일본 와카사만의 쓰루가항에 도착했던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둘째 항로는 경상북도 해안을 출발해 울릉도 밖으로 흘러가 북상하는 쓰시마 난류에 편승, 오키시마(오키제도)를 지나 일본 미호만의 산잉(山陰)지방에 도착하는 뱃길이다.

셋째 항로는 경남 거제도를 출발, 남으로 노를 저어 흐르다가 북상하는 쓰시마 난류를 직접 타고 이키시마를 거쳐 북큐슈 연안에 도착하는 뱃길이다. 신라(800년) 때 해상왕 장보고가 거제도에 청해진을 설치, 이곳에서 일본과 중국을 자유롭게 왕래해 교역했던 것도 바로 이 해류를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넷째 항로는 전라도 해안을 출발, 황해의 저층냉수에 밀려 남하하는 서해연안 해류를 타고 제주도 남쪽까지 흐르다가 북상하는 흑조지류인 쓰시마 난류를 타고 남큐슈 연안에 도착하는 뱃길이다. 전라도 서해안과 남해안에서 생산된 플라스틱 막걸리병과 청량음료수 병들이 쓰시마 북해 연안까지 밀려가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한반도 주위 바다의 흐름 정확히 파악
노 젓는 배·뗏목배로 해류 타고 왕래

일본인들도 한반도로 건너올 때 역시 흑조를 이용했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고조선시대 일본의 조선기술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미숙했다. 따라서 노에 의지한 소형 배로 대한해협이나 동해를 건넌다는 것은 무리였다. 이 때문에 오히려 고조선사람들보다 해류 이용에는 앞섰던 것 같다.

일본인들은 한반도로 들어올 때 쓰시마(대마도)와 큐슈에서 주로 출발했다. 여기서 배를 띄워야 한반도 쪽으로 북상하는 흑조를 이용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첫째 뱃길은 남큐슈 서해안에서 출발, 북상하는 쓰시마 난류를 타고 쓰시마 남쪽으로 나가 여기서 서쪽으로 배를 띄워 대한난류에 편승 북상하다가 한반도 남해안에 이르면, 노를 저어 흑조권에서 벗어나 전남 연안으로 가는 길이다.

둘째로는 쓰시마 북단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조금만 노를 저어나가면 쉽게 북상하는 흑조인 대한난류에 편승할 수 있다. 이 난류는 한반도의 동해안으로 접근해 울산을 지나 영일만까지 이어진다. 일본은 쓰시마 북단에서 이 물길을 이용해 쉽게 한반도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일본이 삼국시대에 들어와 신라를 자주 침범한 것도 바로 이 물길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계절에 따라 대한난류의 세력이 차이를 보이는데, 가장 강할 때가 4∼6월로 삼국사기의 신라본기를 보면 440∼490년 사이 왜인들이 가장 많이 신라를 침입한 계절이 5∼6월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인들은 이런 계절별 해류의 특성을 잘 알고 작은 배들로 한반도의 동해안을 자주 침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조선 땅이었던 만주연안에서 일본 가기는 한반도에서 일본 가기보다 쉬웠던 것 같다. 해류를 쉽게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만 반면에 거리가 먼 것이 위험부담이었다.

첫째 항로는 고조선의 평안도와 황해도 연안에서 출발해 황해 저층냉수권의 세력에 밀려 남하하는 황해 난류를 타고 전라도 서해안을 거쳐 제주도 북쪽에서 동으로 나가 북상하는 쓰시마한류를 타고 쓰시마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둘째로는 고조선의 요동반도 연안에서 출발해 역시 황해저층 냉수역 세력에 밀려 중국 대륙 연안으로 흘러내리는 한류를 타고 동지나해로 남하해 제주도 남쪽에서 북상하는 흑조를 타고 동으로 흘러 쓰시마 난류에 편승, 남큐슈 지방으로 들어가는 뱃길을 들 수 있다.

이들 항로를 증명하는 역사기록으로는 중국사서인 삼국지의 위지(魏志) 왜인전에 ‘위나라 사신이 배로 대방군을 출발해(240년) 구사한국(狗砂韓國)에 도착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위나라는 중국의 삼국시대 나라(220∼265년)이고, 대방군(帶方郡)은 후한(25∼220년)이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접경인 만주의 난하 유역에 세운 군사기지(대방과 낙랑)의 하나이다. 또 구사한국은 한반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일본의 큐슈 지방이다.

위지의 왜인전에는 위나라 사신이 일본에 도착한 해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대방군으로부터 일본에 이르기는 해안을 둘러 물길로 가는데 한국(한반도의 남쪽)을 지나 해류를 타고 삽시간에 남쪽으로, 삽시간에 동쪽으로 가며 일본의 북안에 있는 구사한국에 도착하는 길은 7천여 리이다. 이곳으로부터 다시 1천여 리의 바다를 건너는데 이 바다를 한해(瀚海)라 하며 비로소 일대국(一大國)에 이른다.’

중국에서는 이때 아직 돛배가 등장하지 않아 위나라 사신은 대방군을 거쳐 노 젓는 배를 타고 한반도 서해안으로 남하하는 해류를 이용, 7천여 리의 바닷길로 일본에 갔던 것이다.

고조선의 배와 조선기술
고조선 건국 이전 우리 민족은 구석기시대 초부터 간단한 배를 만들어 깊은 강이나 호수를 건너는데 사용했다. 사냥을 하고 물고기를 잡거나 식물을 채취하기 위해 강이나 호수를 건너야 할 때가 많았을 것이다. 이 물 건너기를 위해 처음으로 만들어 쓴 것이 박으로 만든 배다.

둥근 박에 손이 들어갈 만한 구멍을 내고 속을 다 들어낸 다음 햇빛에 말리면 물에 뜨는데, 이 부력을 이용한 것이다. 이런 둥근 박을 강이나 호수에 띄워 매달려 헤엄쳐 다니며 물고기를 잡거나 식물을 채취했을 것인데, 이 박배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제주도 해녀들이 사용하는 부표로 발전했다.

다음 신석기시대(기원전 6000년)로 넘어와 인간의 지능과 석기용구가 발달되면서 좀더 편리한 수상이동 도구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통나무배다. 큰 통나무의 기둥부분 한쪽에 불에 달군 자갈을 얹어 속을 태운 다음 돌도끼와 돌칼로 파내 통나무배를 만들어 썼다. 이런 상고시대의 통나무배 유물은 안타깝게도 한반도에서 출토되지 않았으나 일본에서는 나왔다. 이에 미루어 상고시대 우리 민족이 썼던 원시적인 통나무배를 연상해볼 수 있다.

일본 지바현의 가모(加茂)유적에서 출토된 통나무배는 기원전 5000년경 조몬시대 중기의 배로 너비 0.7m에 길이 4.7m이다. 이 통나무배와 함께 쓰였던 낚시도구는 한반도의 강원도 동해안에서도 발견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상고시대 통나무배가 일본에 전달된 것이 아닌가 분석하고 있고, 일본 가모유적에서 출토된 통나무배가 한반도 신석기시대에 등장한 통나무배와 모양이 비슷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원전 3000년경부터 뗏목배 쓰기 시작
청동기시대부터 배 제조기술 한층 발전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파도에 약하고 안전성이 없는 단순한 통나무배로는 바다로 나갈 수 없음을 알게 됐다.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가는 통나무를 여러 개 옆으로 이어 엮은 뗏목배였다. 뗏목배는 너비가 넓어 안전성이 비교적 높았다. 그러나 통나무배보다 무겁고 크기 때문에 사람이 손으로 물을 저어 나가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사람의 손을 대신하는 삿대와 노를 만들어 뗏목배를 움직였다. 통나무배에서 뗏목배로 발전하는 데는 긴 세월이 걸렸는데 뗏목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말인 기원전 3000년경으로 보고 있다. 이 뗏목배는 최근까지 압록강이나 남한강에서 볼 수 있었다.

다음으로 나타난 것이 준 구조선(準 構造船)이다. 기원전 2500년경 청동기시대가 열리면서 석기보다 훨씬 강하고 예리한 도끼, 칼, 자귀 등 청동도구들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런 공구의 사용은 뗏목배를 한층 발전시켰다. 뗏목배는 파도에 밀리면 항로를 제대로 잡을 수 없는 것이 단점이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청동공구를 사용해 길고 두꺼운 널빤지를 깎아 뗏목배 밑바닥 앞뒤에 붙여 항로 이탈을 막았다. 이런 배를 준 구조선이라 하는데, 지금도 제주도 연안과 일본 쓰시마 연안에서 사용되고 있다.

청동기시대를 지나는 동안 더욱 발전된 각종 공구로 나무를 깎아 맞추어 만드는 구조선이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데, 구조선이 본격적으로 실용화한 시기는 구체적인 사료나 유물이 없어 확인할 수 없으나 고고학계에서는 청동기 시대가 꽃을 피우기 시작하던 기원전 200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 배는 잘 부식하지 않는 철이나 플라스틱으로 제작되지만 상고시대에는 나무로 만들었다. 나무는 잘 썩기 때문에 오랫동안 보존할 수 없어 지금껏 남아 있지 않고 배의 유물이나 생김새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도 발견되지 않아 간접적인 방법으로 추정할 뿐이다. 가장 오래된 상징적인 유물로는 가야시대의 주형(舟形)토기에 그려진 돛 없는 배인데, 이것은 소형 구조선이다.

청동기시대 고조선 초기 만주지역에서 출토된 바위에 그려진 암각화에는 배를 타고 고래잡이를 하는 그림이 있다. 배에 6명이 탔고 배 꼬리와 뱃머리가 활처럼 구부러진 것을 보면 상당히 큰 구조선임을 알 수 있다. 가야시대 배 모양의 주형토기를 보아도 이 시대의 배를 추정할 수 있는데, 역시 돛 없이 노를 저어 움직이는 소형 구조선이다.

고고학자들 중에는 고조선시대에 돛 달린 배를 쓰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이 시대의 유물에 나타난 배의 그림이나 토기에 돛이나 돛대가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배 제조에 큰 영향을 끼쳤던 중국의 유물을 살펴보아도 이 같은 추정이 가능하다. 전국시대의 누선도(樓船圖)와 후한(後漢)시대의 명기선(明器船) 그림에 그려진 배 역시 돛이나 돛대가 없다. 다만 상당히 발달된 구조선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유물이나 사기를 토대로 학자들은 적어도 6세기 이전까지는 노나 삿대형의 소형 배를 썼고 그 이후에 돛을 단 항해용 큰 범선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2000년경인 선사시대, 즉 고조선 초기부터 돛배를 썼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확실한 역사적 또는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고조선 초기부터 고조선을 이루고 있던 거수국들은 중국 상고시대의 나라인 순(기원 전 2209년)나라에서 하, 상, 주, 춘추, 전국, 진, 전한 나라들과 기원전 1세기 고조선이 사라질 때까지 정치, 문화 교류를 활발히 했다. 조선의 항해기술 역시 고조선보다 중국이 먼저 발달해 돛배가 처음 나타난 것은 상나라 때인 기원전 1600년경이었고, 주나라 시대인 기원전 1100년경에는 돛배를 원양항해용으로 본격 사용했다는 기록이 중국사기에 있다.

서기 220년경 중국의 삼국시대(위, 오, 촉)로 와서는 돛배기 매우 발달했다고 중국사기인 ‘교대조선’기에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과 중국의 초기교역은 주로 육상을 통해 이루어져 수레의 발달을 이끌었으나 물동량이 늘어나면서 험로와 속도, 수송량이 한계에 이르고 외적들의 약탈까지 가세해, 주나라 때부터 발달한 돛배와 항해술을 이용해 기원전 10세기경 해상교류로 방향을 바꾼 것이 아닌가 한다. 이후 초기 해양진출에 따른 모험과 개척의 시기를 지나 고조선에서 큰 범선이 아닌 돛배를 본격적으로 만들어 쓰기 시작한 것은 철기시대 초기인 기원전 6세기경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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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흑조를 이용한 한일간 해상왕래 바닷길기원전 3000년경의 고조선 통나무배 유물가야 초기 배 모양의 토기고조선 후기 준 구조선 모양의 토기고조선 초기의 뗏목배고조선 첫 배인 ‘박배’를 이용하는 모습을 상상으로 그린 그림고조선 말에 등장한 첫 돛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