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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3-18 11:23
뚝심으로 이룬 - 신진 자동차제국
 자동차생활
1962년 등장한 마이크로버스는 신진공업사의 성장기반을 다진 모델이다. 마이크로버스의 등장과 함께 합승택시가 사라졌고 연애 풍속도 바뀌었다.
신진공업사의 창업자 김창원 씨

63년형 신진 마이크로버스

64년형 마이크로버스 앙증맞은 디자인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66년 부산의 신진공업사

한국전쟁을 치른 우리나라는 60년대 말까지 버스가 적어 전국적으로 대중교통이 매우 불편했다. 그나마 길거리를 다니던 버스들도 지금처럼 대형버스가 아니라 기껏해야 11~15인승의 미니버스가 대부분이었다. 전국 곳곳의 정비업소와 운수업자들이 미군이 쓰다 버린 스리쿼터(3/4톤 트럭)를 이용해 만든 이 미니버스는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이어서 혼란을 주었다.

이런 가운데 신진공업사가 1962년 개발한 25인승 마이크로버스는 우리나라 대중교통의 역사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상공부장관상을 탄 마이크로버스는 전국으로 팔려나가 여객 운수업자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1966년까지 무려 2,000여 대가 넘게 생산되어 신진공업사의 기반을 닦아주었고, 그 결과 정부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신진공업사는 우리나라 자동차공업 개척에 앞장섰던 시발의 최무성 씨와 드럼통 버스의 하동환 씨에 이어 또 한 사람의 선구자였던 김창원 씨가 설립했다. 1917년 공주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조치원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후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어렵게 상업학교를 졸업했다. 8·15 해방이 될 때까지 일본과 중국을 떠돌며 독립운동을 도운 그는 해방 직전 귀국하여 조국을 부국으로 만들기 위해 가치 있는 이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고향 공주에 농기구 제작공장을 세웠다. 이때부터 그는 조국을 경제적으로 발전시키려면 무엇보다도 자동차공업을 일으키는 것이라 믿고 자신의 손으로 자동차를 만드는 꿈을 갖기 시작했다.

그 첫걸음으로 한국전쟁이 나기 전 형과 함께 일제시대 때 일본인이 경영했던 대전의 조선리연합항공기 기재회사를 인수했다. 이 공장은 일제 말기에 설립되어 일본 군용차와 전투기의 부속품을 만들던 곳으로, 공주에서 태어난 일본 수상 다나까가 청년시절 근무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리연공장을 인수한 김창원 씨는 이후 한국리연공업사로 이름을 바꾸고 자동차 엔진 부속품을 만들어 미 8군과 국군창설 이전의 국방경비대 자동차용으로 납품했다.

김창원 씨는 배짱 좋고 사교술이 능한 데다가 열정적인 사업가였다. 그러나 사업이 성장 가도를 달릴 무렵 한국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다행히도 한국리연공사 대전공장은 폭격을 면해 전후 곧바로 가동되었지만 군납을 받는 육군병기창과 폐차된 미군용차를 불하하는 미 8군 보급기지가 부산에 주둔하고 있어 1954년 부산으로 공장을 옮겼다.

1955년 2월 신진공업사 설립
부산에 내려온 김창원 씨는 전포동에 있던 미군 모터풀(정비창)을 불하받아 그곳에 공장을 세워 부속품을 만드는 한편 군용차와 민간차를 수리 및 제작하며 1955년 2월 신진공업사를 설립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대우자동차 부산 버스공장의 전신이다.

같은 해 10월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를 관람하던 김창원 씨는 서울의 자동차 기술자 이갑부·이거부 형제가 출품한 미국 윌리스 지프의 스테이션 왜건 9인승 자동차를 보았다. 이들의 뛰어난 자동차 기술에 반한 김창원은 곧바로 이갑부 씨를 신진공업사의 책임기술자로 영입하여 자동차수리 개조 등 현장업무를 맡겼다. 이갑부 씨의 동생 이거부 씨는 다름 아닌 드럼통 버스 왕으로 불리던 하동환 씨의 매부다. 경기도 시흥 출신의 이갑부, 이거부 형제는 일제시대부터 자동차정비업에 종사하던 기술자로 당시 이들의 기술을 따를 자가 없을 만큼 자동차수리, 개조에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신진공업사는 부산에 최초의 자동차공장을 세우고 재기를 노렸으나 사업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형인 김재원 씨가 자동차공업협동조합의 전신인 대한자동차공업협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어 정부의 지원을 받는 기회를 잡았다. 한국전쟁 후 우리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유엔부흥기구 운크라(UNKRA)가 지원한 원조자금 가운데 자동차공업진흥비로 책정된 400만달러(약 46억1,120만원) 중 20만달러(약 2억3,065만원)를 지원받아 새로운 도약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이 돈으로 1958년에 현대식 정비공장을 착공한 신진공업사는 2년 만인 1960년 5월에 공장을 완공하여 사업을 확장했다. 이후 1962년 10월 덕수궁 산업박람회에 출품한 마이크로버스가 상공부장관상을 탄 것을 계기로 정부로부터 자동차를 정식으로 만들 수 있는 대형 및 중형자동차 조립공장 허가를 받게 된다.

신진공업사가 만든 노란색 25인승 마이크로버스는 큰 히트를 치며 1960년대 말 제대로 만든 대형버스가 쏟아져 나올 때까지 도시나 지방 여객수송자동차의 주류를 이루었고, 사람들은 이 버스를 ‘노랑차’라고 불렀다.

한편 1950년대 중반부터 나타난 왜건형 합승택시는 8인승으로 시작해 16인승으로 차체를 키웠지만 신진의 마이크로버스가 나오면서 시장에서 사라졌다. 또한 마이크로버스의 등장으로 남녀가 따로 앉던 관습이 자연스럽게 섞여 앉는 것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젊은 연인들 사이에서는 마이크로버스 뒷자리에서 통금시간 직전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밀어를 주고받는 것이 유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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