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교통문화
2017-01-04  |   25,747 읽음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교통문화


원칙과 상식이 지켜지면 교통사고는 줄고, 사고가 나더라도 잘잘못을 따질 일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교통사고에서 원칙은 ‘신뢰의 원칙’으로, 교통법규를 준수한 운전자는 다른 운전자도 그럴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원칙을 지킨 피해차라 하더라도 조금만 상식적인 주의를 기울여 사고를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면 약간의 과실을 적용한다. 이처럼 원칙과 상식이

조화를 이룬다면 교통사고는 지금보다 크게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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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한해가 저물어 간다. 이맘때면 새해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으로 들떠야 하는데 올해는 오히려 걱정이 앞선다. 국내외 정세 혼란이 가져온 불확실성 때문이다. 대내적으로는 비선세력의 국정농단, 대외적으로는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이 불투명한 미래를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다. 국민은 리더의 비정상적인 의사결정 때문에 국가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국가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를 기대한다.


자동차 운전도 마찬가지다. 원칙과 상식이 지켜지면 교통사고는 줄고, 사고가 나더라도 잘잘못을 따지느라 얼굴을 붉힐 일이 없다. 교통사고에서 원칙이라 함은 ‘신뢰의 원칙’을 말한다. 즉, 교통법규를 준수한 운전자는 다른 운전자도 그럴 것이라고 믿으면 충분하지, 교통법규 위반까지 예상해가며 방어조치를 할 의무가 없다는 뜻이다. 신호위반과 중앙선침범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데, 이때는 가해차량에게 100% 과실을 적용한다. 그런데 멀리서부터 역주행해오는 차량을 보고도 경적을 울리거나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면 신뢰의 원칙만 주장할 수 있을까? 이 경우에는 원칙에 상식을 접목시켜 판단한다. 피해차량이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사고를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고 보기 때문에 10~20%의 과실을 적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식과 원칙은 기본적으로 법규를 바탕으로 하지만 그 사회의 문화도 함께 반영한다. 우리나라와 미국의 운전문화 중 가장 큰 차이는 신호등 없는 교차로를 통과할 때 가장 잘 나타난다. 우리나라는 어느 한 방향의 차량흐름이 끝나면 비로소 다른 방향의 차량들이 움직이는 방식이다. 특히 직진 차량과 좌회전 차량이 경합될 때는 무조건 직진차량이 우선시된다. 좌회전 차량이 깜빡이를 켜고 기다리고 있어도 직진 차량들은 웬만해서는 양보를 해주지 않는다. 그런데 미국은 철저하게 교차로 정지선에 도착한 순서대로 통과한다. 직진이든 좌회전이든 교차로 정지선에 먼저 도착한 차량이 진입 우선권을 갖는다. 한국에서처럼 앞차를 그냥 따라 갔다가는 무식한 운전자 취급을 받는다. 그러다보니 무조건 정지선에 멈춰 서서 사방을 먼저 살피게 된다.


미국의 정지선 문화는 운전면허를 취득할 때부터 배운다. 정지선 앞에서 차량이 덜컹할 정도로 브레이크를 잡고 2~3초간 완전히 멈추지 않으면 면허시험에서 떨어진다. 필자가 미국에 잠시 머물 때 신분증이 필요해서 운전면허시험에 응시한 적이 있었다. 이미 한국에서 오랫동안 운전을 해왔기 때문에 코스시험은 물론이고 주행시험도 전혀 어렵지가 않았다. 하지만 단지 정지선에서 완전히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합격하고 말았다. 교차로 정지선에서 속도를 줄이고 좌우를 살피기는 했지만 그들이 요구하는 수준의 완전한 정지는 아니었다.


최근 몇 년 사이 교통사고 과실분쟁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2015년 금융감독원에 접수된 민원은 1,672건으로 전년보다 10% 가까이 늘었고, 손해보험협회 과실분쟁심의위원회 상정건수는 무려 116% 증가해 4만8,000건이나 된다. 이 중 82%는 교차로 통과나 끼어들기 과정에서 발생한 사고다. 어느 한 쪽의 일방과실 사고가 아님에도 운전자들은 서로 본인이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블랙박스 영상이라도 있으면 과실협의가 그래도 조금 수월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과실산정은 제로섬(zero sum)이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득을 보면 다른 한 쪽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어 양쪽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조금씩 양보를 해야 하는데, 운전자 입장에서는 보험회사가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나눠 먹기식으로 과실을 담합한다는 오해도 받는다.


과실분쟁이 이렇게 증가하는 데는 복잡한 과실비율 산정기준이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교차로 사고의 경우 기본과실이 60:40으로 책정되어 있지만 선진입 여부, 차량속도, 일시정지 여부, 차량 크기 등에 따라 최대 ±70%까지 과실비율이 조정되기 때문. 보험연구원은 이에 따른 과실분쟁을 줄이기 위해 캐나다(온타리오 주)처럼 사고유형별 과실적용 기준을 단순화하자고 제안했다. 모든 사고의 과실을 100:0, 75:25, 50:50로 단순화하면 분쟁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논리다. 실제로 이 방식은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적용된 적이 있다. 울산의 ‘공업탑 회전교차로’는 한때 우리나라에서 교통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곳이었다. 회전교차로는 신호대기 없이 통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양보운전을 하지 않으면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럼에도 공업탑 회전교차로에서는 과실분쟁이 전혀 없었다. 무조건 50:50을 적용하기로 사회적 동의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신호등이 설치되면서 사고발생이 줄었지만 과실분쟁은 되레 늘었다. 앞으로 정부와 보험업계가 더 연구를 해야 하겠지만 교차로 사고는 50:50, 끼어들기 사고는 75:25로 단순화하면 운전자들끼리의 감정싸움도 사라지고, 차를 세워두고 보험회사 직원을 기다려야하는 일도 없어지지 않을까.


최순실 게이트는 우리에게 분노와 부끄러움과 자괴감을 안겨주었다. 국가 시스템과 법 제도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을 때 얼마나 큰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국민의 신뢰가 있어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듯이 운전자도 서로 신뢰해야만 안전한 교통문화가 형성될 것이다. 촛불집회에서 보여준 성숙한 시민의식을 이제는 운전문화에서도 보여줄 때다.​

(The-K 손해보험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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