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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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숨결과 발자취를 오롯이 만나는
강진(上)

초당의 툇마루에 앉으니 동백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로 인해 어두컴컴하다. 오른편으로 다가서자 거짓말을 보태면 손바닥보다 조금 큰 연못, 연지석가산이 시선을 끈다.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라는 뜻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키우던 잉어를 보고 날씨를 알아냈다고 한다. 다산초당에서 발길을 돌리기가 아쉽다면 2014년 문을 연 다산기념관에서 채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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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작은 구릉과 너른 들의 끝자락이 만나고 헤어지고 또 다시 포개어지며 지는 해의 기운을 빨아들일 즈음, 강진읍내의 가로등이 하나 둘 기지개를 켠다. 발길이 드문 소도시지만 버스터미널은 광주와 목포, 순천 등에서 차가 도착할 때마다 대처로 나갔던 이들이 하나 둘 땅을 딛고 걸음을 재촉한다. 여정의 끝이어서일까, 노곤한 기색이 역력한 가운데서도 그들의 눈망울은 곧이어 하늘에 지천으로 깔릴 별처럼 초롱초롱하다. 아마도 그리운 이들을 만나러 가는 길일 게다.


2010년 10월 전남 영암의 코리아인터내셔널서킷(KIC)에서 국내 최초로 세계 모터스포츠의 최고봉인 ‘F1 코리아 그랑프리’가 열려 처음으로 강진을 찾았을 때의 풍경이 떠오른다. 국내외 팬들이 몰려들었지만 목포와 영암 일원에는 이들을 수용할 숙박시설이 한참 모자랐다. 값은 평소보다 2~3배가 뛰었고, 그나마 자리를 잡기도 불가능해 도심에서 조금씩 떠밀리어 갔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강진이나 장흥을 지나 보성과 순천에 숙소를 정하는 게 나았다. 마침 일정보다 하루 더 일찍 내려왔기에 저 멀리 순천의 송광사를 둘러보고, 벌교에서는 태백산맥의 소화를, 보성의 녹차밭 대한다원 등지를 쏘다녔다. 그러다 멈춘 곳이 강진이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땅거미가 올라오자 한 몸 쉬어갈 곳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고, 몸은 물을 잔뜩 머금은 솜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난 그냥 강진에 갈 뿐이다”
강진은 F1 그랑프리의 여파에서 비켜선 듯했다. 읍내의 숙박시설은 여유가 있었고 값도 평소와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짐을 풀어놓을 것도 없이 그대로 방에 던져 놓은 후 시장기를 달래기 위해 시내를 둘러보았다. 도시에서는 초저녁이라고 해도 좋을 때임에도 일찍 하루를 마감하고 있었다. 간판은 한 집 건너 불을 내렸고 불이 켜진 곳도 이내 어둠의 대열에 합류했다. 가로등 불빛이 점점 더 밝기를 더해가는 것과 비례해 저녁을 건너뛰어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오던 기억이 새롭다.  

강진. 코리아 그랑프리가 열리기 전까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낯설고 조그만 도시는 유흥준 교수가 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통해 빛바랜 사진처럼 다가서고 있었다. 유 교수는 “조용하던 시골은 은둔자가 낙향을 했던 곳이었거나 유배객의 귀향지였을 뿐”이라면서도 “뜻있게 살다간 사람들의 살을 베어내는 듯한 아픔과 그 아픔 속에서 키워낸 진주 같은 무형의 문화유산이 있고, 저항과 항쟁과 유배의 땅에 서려 있는 역사의 채취가 살아 있다”고 이 땅을 소개했다. 그리고 당시 그와 함께 답사를 했던 제자들은 “마치 꿈결 속에 다녀온 미지의 고향 같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한해에 수십여 차례 목포(숙소가 있는 곳)와 영암 서킷(KIC)을 오가지만 강진과의 거리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았다. 가끔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질문을 해도 좀처럼 답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지난 여름, 일을 핑계로 강진행을 단행했다. 단지 일탈이라는 이름으로…….


모처럼 아내와 아들과 함께 한 가족여행. 서해안고속도로에 차를 올린 후 목포 톨게이트를 통과할 무렵 해넘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멈춰야 했다. 세상은 곧 어둠의 망토를 두를 것이고, 무엇보다 아내와 아들이 더 이상 나가는 것을 꺼려했다. 목포에서 맛집으로 제법 이름을 알린 옥암로의 ‘별 스넥’에서 병어회로 저녁식사를 한 후 평화광장으로 나갔더니 분수 쇼가 한창이다. 음률에 맞춰 무희처럼 흐느적거리다 다시 휘감아 돌고 격하게 수직으로 물줄기를 뿜어 올린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은 신이 났고, 연인들은 아름다운 시공간을 마음껏 음미하며 추억쌓기에 여념이 없다.


이튿날, 서두른다고 그렇게 재촉을 했음에도 해는 이미 중천에 걸렸다. 이곳에서 다산초당까지 거리는 50여km에 불과하나 시간상으로는 1시간이 걸린다. 남해고속도로는 한산했다. 강진IC를 빠져나온 후 강진군청으로 방향을 잡으니 내비게이션이 친절하게 길을 안내한다. 창밖은 더 이상 짙어질 수 없는 벼와 잡풀들이 뽐내듯 다투는 녹색의 향연과, 이에 질세라 푸르고 깊은 하늘, 그리고 시뻘건 백일홍이 드문드문 수줍게 얼굴을 내밀었다. 창문을 열자 한여름이 무서운 기세로 몰려들어 차안이 후끈 달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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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안내하는 이정표


강진 초입에서 다산초당까지는 지척이다. 동백나무와 삼나무, 소나무, 굴참나무 등이 제공하는 짙은 그늘에 얽히고설킨 나무의 뿌리들이 마중을 나왔다. 정호승 시인은 ‘뿌리의 길’이라는 시를 통해 이렇게 노래했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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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

그렇게 오른 다산초당(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쓴 것이다)은 초가가 아니라 기와를 올렸다. 본디 초가였던 것을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가 반뜻하게 지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18년 동안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은 윤씨 집안의 서당으로 쓰이던 이곳에 놀러왔다가 아늑하고 조용하며 아름다운 경치에 반했다. 이에 시를 지어 머무르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10여 년을 이곳에서 머문 다산은 18명의 제자와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책을 썼다. 


초당의 툇마루에 앉으니 동백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로 인해 앞이 막혀 어두컴컴하다. 오른편으로 다가서자 조금 과장해 손바닥보다 조금 큰 연못이 시선을 끈다. ‘연지석가산’으로 불리는데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라는 뜻이다. 다산은 이곳에 잉어도 키웠는데, 잉어의 움직임을 보고 날씨를 알아냈다고 한다. 그곳에서 한 걸음을 더 나가면 백련사로 가는 길로 이어진다. 길이는 1.0km 정도지만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부담감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다산초당에는 ‘다조’와 ‘丁石’ 등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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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석가산은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라는 뜻이다

다산초당의 부족함 기념관에서 가득 채워
다산의 숨결을 느끼지 위해 찾은 다산초당. 하지만 왠지 아쉬움이 남는다. “이게 다일까? 다산은 이렇게 초당에서 훗날 자신의 발자취를 찾아올 후인들에게 잠시 땀이나 식히고 가기만을 원했을까?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불볕더위에 숨이 턱 막혔고, 연신 흐르는 땀을 훔쳐낸 손수건은 흥건했다.


그러나 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산기념관’이라는 이정표가 이끄는 곳으로 향하자 그곳에 다산이 있었다. 이곳은 강진군이 다산의 유배생활을 기념하기 위해 다산초당 아래에 세운 것으로 2014년에 문을 열었다. 기념관 입구에 제자를 가르치는 다산의 모습을 모형으로 제작해 놓았고, 벽면에는 “아래로는 백성을 두려워하고, 위로는 감찰기관을 두려워하고, 그 위로는 조정을 더 두려워해야 하고, 또 그 위로는 하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목민관이 경계해야 할 4가지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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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에 대한 갈증은 다산기념관에서 채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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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관 입구에는 다산과 제자들이 공부하는 장면을 모형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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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이 축저한 수원 화성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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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각종 저술과 당시 교류했던 학자들의 별첩과 간찰들이 전시되고 있다


기념관은 다산이 공부하던 어린 시절부터 관료생활 시절의 모습들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다산을 총애하던 정조의 죽음과 뒤이은 유배로 강진에 머무른 과정 등도 동영상으로 알기 쉽게 재현해 놓았다. 기자는 특히 부인과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오롯이 담겨 있는 ‘하피첩’과 ‘매화병제도’에 시선이 고정된다.

결혼한 지 30년, 유배 간 남편과 헤어진 5년 후 다산의 부인 홍씨는 시집올 때 가져와 장롱 밑에 넣어둔 붉었던 치마를 남편에게 보낸다. 세월이 흘러 빛이 바랜 그 치마는 여인의 모든 것으로, 남편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절망감이 묻어 있었다. 이에 다산은 치마를 마름질해 여러 폭으로 나눠 두 아들에게 경계의 말을 적어주었다.

이것이 ‘하피첩’이고, 남은 치맛자락에 유배생활로 12년 동안 보지 못한 딸의 결혼을 축하하며 매화 꽃가지 위에 정다운 멥새를 그려 선물한 것이 ‘매화병제도’다. 이밖에 기념관은 다산의 일생과 주변 인물들을 그림과 동영상, 조형물 등으로 제작해 일반인들이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친근감 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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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생활을 하던 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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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조에서 차를 즐기는 다산의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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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가는 딸에게 선물을 한 매화병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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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에게 보낸 하피첩과 경직의방



다산기념관에서 자동차로 채 5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백련사’가 있다. 통일신라 문성왕 1년(839년)에 지어진 이 사찰은 고려후기에 8국사와 조선후기 8대사를 배출했다고 한다. 백련사의 동백나무 숲은 크기도 어마어마해 5.2헥타르의 면적에 7,000여 그루가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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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문성왕 1년에 지은 백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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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련사 대웅전 옆에 활짝 꽃을 피운 백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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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련사 한 전각의 실내

 

숲 전체가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됐다. 일주문을 지나 경내까지 이르는 300m의 비탈길은 오래된 동백나무와 후박나무, 그리고 비자나무가 도열하듯 늘어서 햇빛을 걸러낸다. 대웅전에서는 예불 올리는 승려의 독경과 목탁소리가 은은하다. 그 곁에는 수백 년의 세월동안 뿌리를 내렸을 백일홍이 단청 고운 처마와 수시로 바뀌는 하늘빛, 그리고 저 멀리 강진만의 물결과 멋진 하모니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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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경내로 오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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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에서 훤히 보이는 강진만의 풍경


아직도 강렬함을 잃지 않는 햇빛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시장기가 슬슬 고개를 내민다. 오늘의 메뉴는 강진에서 한정식으로 유명한 ‘남문식당’. 하지만 자리가 없다. 한껏 기대하고 갔는데, 헛물을 켜고 말았다. 허탈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한 손님이 생선구이 정식을 하는 식당을 소개해준다. 돌솥에 밥을 해서 내놓고, 고등어와 열기, 전어 그리고 갈치를 구워서 내는 집이었는데, 정갈하고 깔끔한 맛에 감탄이 저절로 일었다.(다음호에 계속) 

글 사진  김태종(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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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읍내의 생선구이 정식집의 상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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