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생활 33주년 창간기념 특집- 33번 버스와 함께 한 삼삼한 오후[4부]
2017-09-12  |   11,256 읽음



​본 기사는 총 5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동차생활 33주년 창간기념 특집 

​CARLIFE 33

우리는 단 하나의 고민으로 머리를 맞댔다. “거창하지 않은 창간기념 특집을 만들어보자.”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30년 묵은 올드카와 시내버스를 포함한 5대의 차를 시승하면서 도합 5,000km이상을 주행했다. 결국 이렇게 스무 페이지 분량의 대형 특집 기사를 만들어버렸다. 기자 다섯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33주년을 기념하다보니 스케일이 절로 커져버렸다. 누구는 33번 버스에 올랐고, 누군가는 33번 국도를 달렸으며, 어떤 이는 3,333km 시승에 도전했다. 숫자 ‘33’을 이름에 새긴 역사 속 자동차를 되짚어본 이도, <자동차생활>이 창간한 1984년에 등장한 올드카를 시승한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단 하나의 다짐으로 책을 만든다.

“대한민국 최초의 자동차 전문매체로서 부끄럽지 않은 기사를 쓰자.”가끔은 실패한다. 때로는 좌절한다.

하지만 다시 한번, 또 한번, 마음을 다잡는다. 그렇게 쌓아온 시간이 33년이다.
* 글 <자동차생활> 편집부 사진 최진호, 최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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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번 버스와 함께 한 삼삼한 오후


창간 33주년과 33번 버스의 유일한 공통점은 숫자 33. 덕분에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버스를 타게 됐다. 부랴부랴 노선도를 살펴보니 웬걸, 내가 잘 아는 동네도 지나간다. 안심이 된다. 버스에 오르니 차체 진동이 나를 묘하게 긴장시킨다. 버스가 친히 말을 건네는 듯하다. “어서 와. 위례신도시는 처음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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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동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 옛 동네를 오랜만에 찾아가는 반가움과 처음 가는 도시에 대한 설렘이 같이 있었다. 역을 나오자마자 그 좋은 기분은 더위에 밀려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객지로 떠나는 묘한 기분을 달래보려고 근처 잡지사에 근무하는 동생에게 문자했지만, 그녀는 인터뷰가 있어 막 지하철에 올랐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연락이 끊기면 찾아 달라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정류장은 7번 출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익숙과 낯섦 사이
서울 강남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집이 부유한 편은 아니었지만 학군이 좋은 동네라 부모님이 어찌어찌 버티시다가, 대학교까지 졸업하고 나서야 공기 좋은 동네로 이사를 갔다. 나이가 조금 드니 오래 살던 동네가 그리울 때가 있다. 가끔 강남에 가면 아무도 만나지 않고 기억을 더듬어 이곳저곳 걷게 되는 이유다. 33번 버스의 기점이 있는 위례신도시는 행정구역이 통합되지 않고 서울시 송파구, 성남시 수정구, 하남시 학암동 등 3지역으로 이루어졌다. 이름은 백제의 수도였던 위례성에서 가져왔다. 학동역을 기점으로 되돌아가 강남-양재를 지나 내곡-세곡을 거쳐, 위례신도시로 향하는 33번 버스는 내게 익숙함과 낯섦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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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 오르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지하철에서 품었던 좋은 기분을 되살려준다. 비밀리에 임무를 수행하는 스파이처럼 조용하고 빠르게 후륜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엔진 근처에 앉았지만 엔진음이 꽤 조용해 적막이 버스 안을 채운다. 내부가 깔끔하고 버스 특유의 향이 거의 나지 않았다. 평소 냄새에 민감해 담배에 불이 붙기도 전에 담뱃불 냄새를 알아차리는 나로서는 만족할 만한 수준이다.

좌석 가죽은 아직 늘어지지 않아 앉아 있는 엉덩이를 알맞게 감싼다. 그도 그럴 것이 33번 버스는 개통된 지 6개월이 조금 넘은 신입이다. 2017년 올해 2월 6일 새벽 5시 첫차를 시작으로 위례신도시와 강남을 이어주는 유일한 노선이다. 수요를 감안해 승차 정원 49석(입석 면적 포함) 정원의 대형버스로 운행되고 있지만 출퇴근 시간이 아니면 아직은 한산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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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논현과 신사를 지나 강남역에 이르렀다. 강남역. 데이트하기에 좋은 곳이다. 연인이나 연인으로 지내고 싶은 사람이 고기를 좋아한다면 지오다노 뒤편에 고깃집 골목에 가는 걸 추천한다. 걷기만 해도 고기 냄새 덕분에 기분이 좋아져 ‘이게 사랑일까’ 하는 착각에 빠지게 할 수 있다. 배를 채웠다면 ABC마트가 있는 반대편 블록으로 산책을 핑계 삼아 슬슬 걸어가자. 분위기 좋은 바가 꽤 있다. 조명이 그윽한 곳에서 마시는 와인 한 잔은 사랑행 급행열차가 되어 종착역에 데려다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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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잡한 강남역 일대와 양재를 빠져나가자 도로에 숨통이 조금 트인다. 창밖 전경은 꾸준하게 바뀐다. 아찔한 건물이 사라지고 눈에 푸르름이 들어온다. 서울의 남쪽 끝을 알리는 신호다. 눈에 들어온 내곡 지구. 이곳은 개발제한구역으로 주로 공공주택지구가 들어섰기 때문에 시야가 탁 트여 있다. 강남과 성남 사이에 있어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까닭에 금싸라기 땅으로 불린다. 내곡을 지나면 이어서 세곡 지구가 나온다. 이곳 역시 개발제한구역이라서 공공주택이 많이 보이지만 내곡에 비해서는 개발이 조금 더 이루어진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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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곡까지 지나면 위례신도시가 나온다. 점차 다가오는 위례신도시는 마치 독립된 세계처럼 보였다. 갑자기 나타난 도회적인 풍경을 눈에 온전히 담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자로 잰 듯 군더더기 없는 길,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진 나무, 높고 거대한 아파트 단지와 한적한 도로. 깔끔하고 이국적이지만 조금 삭막해 보이는 풍경은 이곳이 신도시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위례신도시는 강남에 몰린 주거 수요를 완화하기 위해 조성됐다. 2005년 8.31 부동산종합대책에 의해 그린벨트가 해제됐고 송파 신도시로 불리다가 2008년 위례신도시 계획안에 의해 정식으로 위례신도시로 불리게 됐다. 면적은 강남구 삼성동의 두 배가 조금 넘는다.


수시로 바뀌는 창밖 풍경을 가만히 지켜봤다. 문득 해운대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5월 초에 다녀온 해운대는 바다와 어우러진 아파트 단지가 꽤 이국적이어서 마음에 새로운 길을 냈는데, 위례신도시가 같은 길을 냈다.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섰지만 답답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평지가 많고 건물들이 도로에서 적당하게 떨어진 덕분에 보도를 걸으면서 시선을 멀리 둘 수 있기 때문. 같은 방향으로 계속 걷다 보면 바다라도 나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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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점인 위례동주민센터에는 컨테이너로 만든 기사 휴식공간이 있다. 여정을 함께 한 최찬성 기사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 봤다. 기사들의 휴게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회사에서 마련해준 공간이라고. 잠을 쫓을 수 있는 믹스 커피와 벽걸이 에어컨이 있어 생각보다 쾌적했다. 커피를 한 잔 하려고 김연아가 광고한 부드럽게 생긴 화이트 믹스커피를 집었더니 최 기사는 역시 김연아라서 부드럽다며 내 선택을 지지해줬다.

 

새로운 재미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왔던 버스덕후가 생각났다. 버스를 너무 좋아해 7년 동안 매일 버스를 10시간 동안 타온 그. 나는 그만큼은 아니지만 이렇게 편하고 저렴하게 서울 시내와 근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게 즐겁고 새삼 놀라웠다. 위례신도시에 있을 때 내리던 비는 내곡 지구에 이르러서 그쳤고 하늘은 파란 미소를 지었다. 퇴근 시간에 움직인 탓에 버스가 학동역으로 돌아오기까지 1시간 반이 걸렸다. 정류장에 내리자 다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출발할 때와는 다른 묘함이다. 낯섦은 사라졌고 왠지 모를 여운이 버스에 남아 있는 듯했다. 그걸 알 리 없는 버스는 묵묵하게 학동역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했고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뒷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가 나갔다. 자, 내일은 어디로 가볼까?

김태현 사진 최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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