닛산 피가로 파오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 귀여운 악마
2001-02-28  |   30,516 읽음
필자가 재미나게 시청하는 TV 프로그램 중 하나는 시청자들이 가지고 나오는 가보(家寶)나 골동품들의 진위를 가려주고 가격도 매겨보는 프로그램이다. 참여하는 출연자들 대부분은 내심 자신들의 소장품이 족히 몇 십 년, 아니 몇 백 년을 넘기는 세월의 흔적을 지닌 것들로 심지어는 금전적 가치까지 높기를 바라겠지만, 필자의 속마음은 좀 다르다. 이 방송에 나온 모든 작품들이 진품이고 아울러 높은 평가와 가격까지 인정받는다면, 아마도 필자는 이 프로그램을 그렇게 재미나게 보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선대의 훌륭한 작품들을 감상하는 기쁨도 크지만 가끔씩 섞여 나오는 진품을 가장한 ‘모조품’들을 보는 재미가 더 큰 것은 필자만의 짓궂음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몇 대를 거쳐 ‘요강’으로 쓰던 도자기에서 느껴지는 ‘필(feel)’이 심상치 않아 들고 나와보니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고려청자임이 밝혀지거나, 집안 가보로 고이 간직하라는 할아버지의 유언만 믿고 장롱 속에 꽁꽁 숨겨놓았다가 엄청난 기대에 부풀어 들고 나온 그림이 5만 원도 채 되지 않는 모조품임이 드러날 때의 극적인 ‘반전’은 그 물품들이 방송에 공개되기까지의 사연과 더불어서 베스트셀러 소설 못지 않은 재미를 주는 것이다.

오늘의 시승차 파오(Pao)를 처음 만났을 때는 이런 ‘반전’이 너무 눈에 띄어 가증스러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마치 2차대전 중에 태어난 듯한 모습이면서도 연대 추정이 불가능한 외모는, 단순히 레트로 모델이라고 밀어 부치려 해도 의도적으로 세월의 흔적을 만들려고 애쓴 모습이 너무나 뚜렷하다.

사실, 이러한 파오의 ‘가증스러움’은 가문의 혈통이다. 닛산은 1982년에 데뷔한 소형차 마치를 기본으로 1987년 컨셉트카 Be-1을 탄생시킨다. Be-1은 양산되어 성공을 거두었고 만화영화의 주인공 같은 에스카고를 현실세계로 끌어내어 오늘의 주인공 파오에 이르기까지 그 혈통을 이었다. 가문의 대는 끊이지 않아 1991년에는 모던클래식카의 시발자 격인 피가로, 그 후로도 탱고, 볼레로, 룸바 등이 나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아무튼, 이들 족보에 있는 차들의 공통점은 시대를 가장한(?) 가증스러움과 재미난 외모, 그리고 고무줄 나이의 연예인들처럼 외모만으로는 연령추정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겉모습과 실내

나이를 알 수 없는 ‘만화 같은’ 외모

파오의 외모는 위에서 잠시 이야기했듯이 섣부른 연대추정을 불가능하게 한다. 앞모습은 ‘월레스와 그로밋’에 등장하는 빨간 장갑을 뒤집어쓴 악당 펭귄처럼 귀여움을 넘어 사악함(?)을 보이기까지 하고, 뒷모습만 떼어놓고 보면 2차대전 당시 롬멜 장군 전용차로 쓰였어야할 것 같다. 옆모습이라고 평범할 리 없다. 영락없는 미국 영화에 등장하는 피자 배달차다. 이 세 가지 모습을 합쳐 놓는다면 ‘롬멜 장군이 월레스와 그로밋에게 피자 배달 갈 때 타는 차’가 되어버리니 이쯤 되면 글로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독자 여러분들이 이미 눈치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인 분위기는 유행 따라 간다고 여기 저기 가위질하고 세탁기에도 돌려보고 하다가, 찢어진 게 아니라 아예 구멍이 나버려 못 입게 된 청바지를 보는 듯하다. 세월의 흔적을 만들어보고자 덧붙인 도어의 경첩, 삼각형 창, 버스 미러, 파이프라인 범퍼 등은 흔적이 아니라 세월 그 자체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한 마디로 90년대 기술로 만든 50년대 차라기보다는, 50년대 부품으로 90년대에 만들어진 차라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특이한 모양의 유리창너머로 자꾸 눈길을 당기던 실내는 도어를 열고 들어서는 순간 미소를 머금게 한다. 도대체 적응이 안 되는 외모와는 달리 인테리어 구성은 이 차의 나이가 열 살이 되었음을 잊게 해 줄 만큼 수준급으로, 모던 클래식을 표방하는 차들이 갖추어야 하는 전제조건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내장재의 재질이 너무나도 고급스러워 대시보드와 스티어링 휠, 도어손잡이, 그리고 작은 스위치들까지 마치 플라스틱이 아닌 상아로 만들어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스티어링 휠의 서클과 속도 게이지의 베젤 라인이 이루어내는 일체감도 너무나 예뻐 눈길을 뗄 수가 없다. 살짝 부푼 경음기 커버는 왠지 자꾸 눌러보고 싶게 생겨, 차에서 내리기 전 (아무도 없건만) 괜스레 살짝 눌러보았다. 다만, 시프트 레버와 시트의 생김새, 재질은 또 한번 외모에서 느꼈던 충격을 일깨우듯 부조화를 보인다. 같은 연식의 ‘마치’ 것을 그대로 얹은 듯하다.

나들이

오랜만에 맛본, 달리는 즐거움

드디어 시동을 걸었다. 한껏 늘어진 고양이 목에서 나는 소리처럼 ‘가르릉’ 거리는 리터카급(987㏄) 엔진은 제법 리드미컬한 진동을 만들어낸다. 점차 속도를 높이자 왜 영국인들이 바다건너 일본에서 그리도 많은 피가로를 싣고 갔는지 이해가 된다. 달리는 쾌감이 이만저만 아니다. rpm 게이지는 있지도 않지만 볼 생각도 들지 않을 뿐 아니라 예쁘게 생긴 속도계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긴다. 보네트 밑으로 사라져 가는 아스팔트 도로와 가고자 하는 길의 끝이 보일 뿐이다. 정말 오랜만에 누려보는 ‘달리고 있다’ 는 느낌이다. 꼭 누군가 필자가 타고 있는 손수레를 신나게 끌어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파오를 타면서 0→시속 100km 가속성능을 따지고 언더스티어니, 오버스티어를 논하고 싶지는 않다. 파오는 운동성능 운운할 차가 아니며 실제 운동성능도 그저 그런 편이다. 코너링은 30∼40km의 속도로 90。코너에만 들어가도 기울어진다기보다는 넘어질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제동력도 수준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는 즐거움이 마치 지붕 씌운 트라이엄프나 모건 같은 영국차를 타고 있는 것에 버금간다.

단, 파오에게서 재규어나 모건의 ‘심오한 드라이빙의 터치’까지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코너링할 때 같은 정도의 동선을 그리며 비슷한 거동을 보였다고 하더라도, 2톤을 넘는 무게에 30mm 넘는 암으로 중무장한 서스펜션을 갖춘 차와 800kg도 안 되는 차에서 공유할 수 있는 감각은 ‘시각적인 느낌’뿐이다. 커피에 우유를 탄 카페오레와 커피맛 우유의 차이쯤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국내도로에서 오른쪽핸들 차를 탄다는 것은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일이다. 특히, 폭이 넓은 풀사이즈 세단이나 고성능 스포츠카의 경우는 차선을 맞추거나 위급한 상황에서의 대처능력이 떨어지고 일상적인 운전마저 불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오를 시승하는 동안은 오랜만에 타보는 오른쪽핸들 차였음에도 편안한 운전이 가능했다. 유리창은 수동식이지만 차체가 작아 운전석에서 조수석쪽 창문을 여닫는 데 불편함이 없었고, 주차표를 주고 받을 때도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고속도로 통행용으로 손 모양의 집게가 달린 막대 하나만 준비하면 대한민국 전체를 휘젓고 다녀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주차 등을 위해 후진기어를 넣으면 ‘또또또……’하는 경고음이 들려온다. 달리는 즐거움이 컸던 탓인지 소리에 민감한 필자에게는 이 소리마저 깜찍하게 들렸다. 주차선을 맞추기 위해 이리저리 돌려대는 스티어링 휠의 감촉이 너무나 좋다. 차갑지만 매끄럽고, 가늘지만 단단하다. 이것 역시 영국의 H.M.C.나 케이터햄같은 키트카에서 맛볼 수 있는 쾌감이다.

파오를 보내며

파오는 뿌리깊은 정통성을 배경으로 하거나 뛰어난 메커니즘을 기초로 태어난 차가 아니다. 그런 탓에 오늘 필자가 쓴 글은 시승기라기보다는 ‘소개기’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그저 보았을 때 재미있고 타보면 즐거운 차라고나 할까. 파오에게 그 이상이나 그 이하의 의미부여는 필요치 않다. 단지 파오를 보면서 “우리에게도 언젠가 어려운 경제상황을 넘어서 좀더 넉넉한 마음으로, 단순한 의미의 양산차만이 아니라 파오처럼 만화적인 발상에서 나온 차까지도 만들 수 있는 폭넓은 선택의 시대가 왔으면”하는 바램을 가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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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로 파오. 닛산의 대표적인 모던클래식카 가운데 하나다
파오는 ‘50년대의 부품으로 만들어진 90년대의 차’라고 할 수 있다
위아래로 시원하게 열리는 트렁크 도어
작은 체구에 약한 엔진을 얹고 영국 키트카 못지 않은 운전재미를 준다
고급소재와 꼼꼼한 마무리가 돋보이는 파오의 실내
배낭처럼 생긴 시트 포켓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예쁘게 생긴 속도계
아래쪽을 밀어서 여는 뒤창 역시 복고적이다
‘피자 배달차’처럼 생긴 옆모습
신호등을 연상시키는 리어램프
앙증맞은 165/70 HR12 타이어
고풍스런 도어트림
한 마디로 재미있는 차 파오. 곳곳에 만화적 발상이 가득하다 
987cc 52마력 엔진을 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