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가 나타났다!- 랜드로버 디스커버리 익스피리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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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로버 디스커버리 익스피리언스
늑대가 나타났다!


언제부터 SUV가 이렇게 순했나. 산과 들을 누비던 터프한 녀석들은 다 어디 가고, 이제 도로 위엔 센 척하는 순한 SUV가 판친다. 이 차들은 도로에 길들여져 흙 밟는 법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여기 여전히 야성 넘치는 SUV가 있다. 도로에 갇힌 애완견 같은 요즘 SUV와 달리 흙 위에 당당히 설 수 있는 늑대 같은 차, 랜드로버 디스커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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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 디스커버리가 달갑지 않았다. 기자가 차를 좋아하는 계기가 된 깍둑깍둑 각진 디스커버리가 너무 날렵하게 변했기 때문이다. 디스커버리 컨셉트카가 나왔을 때만 해도 ‘설마 아니겠지’라며 애써 외면했건만, 결국 그 모양 그대로 나왔다. 그래서 신형 디스커버리를 대하는 마음은 마치 수수함이 사라진 옛 첫사랑을 보는 것처럼 오묘했다. 하지만 웬걸. 직접 만나보니 이 차는 내가 사랑하던 그 디스커버리가 맞다. 처음 디스커버리2에서 느꼈던 그 강렬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6월 마지막 주, 랜드로버가 준비한 디스커버리 익스피리언스 행사장을 찾았다. 철제 구조물 오프로드 체험과 실제 오프로드, 그리고 도로 주행까지 디스커버리를 자세히 살필 수 있는 행사다. 오전 일정은 철제 구조물 체험. 꽤 재밌게 만들어놨지만, 솔직히 구형 프리랜더도 무난하게 통과할 수 있을 난이도다. 신형 디스커버리에겐 장난스러운 코스인 셈. 예상대로 수월하게 통과했다. 굳이 감상을 적자면, 바퀴가 헛도는 순간 운전자가 느낄 새도 없이 재빠르게 동력을 나눈다는 점, 차체를 빨래 짜듯 비트는 구간에서도 삐거덕 소리 한 번 없었다는 점 등이 인상 깊다. 그런데 이 정도는 랜드로버라면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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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로버가 준비한 구조물은 디스커버리에게 식은 죽 먹기다


오전에 몸을 푼 디스커버리는 오후에 진짜 오프로드에 들어섰다. 시승차는 TD6 HSE. 6기통 엔진이 들어간 가장 저렴한 9,420만원짜리 모델이다. 오프로드 진입 전 에어서스펜션 차고를 높이자 앞뒤가 차례로 쑥쑥 높이를 올린다. 기존보다 최대 75mm 높인 것으로, 이때 최저지상고는 283mm다. 높아지는 차고와 함께 자신감도 덩달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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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고를 올리면 최대 75mm나 높아진다


첫 코스는 흙길에 날카로운 돌이 이리저리 박혀 있는 오르막길이다. 지상고가 워낙 높다보니 이 정도는 전혀 문제없다. 이런 노면에서도 승차감은 제법 괜찮다. 일반 SUV라면 분명 ‘쿵쿵’거릴 길이었지만, 디스커버리는 서스펜션이 충격을 기분 좋게 둥글려 ‘툭툭’하면서 지나갔다. 랜드로버의 오랜 노하우가 느껴지는 부분. 덕분에 돌길에서 속도를 높여 기분 좋게 통과했다. 다만 운전대 잡은 기자는 괜찮은데, 동승한 기자는 얼굴이 점점 굳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산 정상까지 올랐다. SUV에 앉아 편하게 드넓은 들판을 내려다보노라니 마치 좋은 무기를 앞세운 정복자가 된 기분이다. 그런데 이 정도 길은 디스커버리한테 시시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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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안에 앉아 내려다보면, 마치 정복자가 된 기분이다

늑대의 놀이터
지금까지 오른 길은 4륜 바이크용 코스였다. 디스커버리에겐 시시할 수밖에 없는 셈. 오프로드 명가의 후손이 겨우 이 정도로 만족할 리 있겠는가. 역시나 랜드로버는 산 중턱에 디스커버리를 위한 전용 놀이터를 마련해놨다. 놀이터 입구는 약 90cm 깊이의 도강 코스다.


90cm. 우습게 들릴지 몰라도, 1m에서 겨우 10cm 빠진 깊이다. 일반 차라면 흡배기관으로 물이 들어와 시동이 꺼질 만한 수준이다. 가속 페달에 힘을 줘 서서히 진입하자 보닛이 흙탕물 속에 푹 꼬꾸라진다. 헉, 그릴이 잠겼다. 흡기가 걱정될 찰나, 뒤쪽도 함께 물속에 잠기면서 보닛이 다시 솟구쳐 오른다. 물은 딱 바퀴가 모두 잠길 정도로 찼다. 운전석에서 보면 엉덩이 높이까진 물이 찬 것 같은데, 차는 아무렇지 않게 앞으로 나아간다. 사실 차보다 발쪽으로 물이 스며들 것 같은 기분이 더 공포스럽다. 더 두려워지기 전에 서둘러 물길을 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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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어가 완전히 잠길 정도의 물길을 헤쳐나가는 디스커버리


이어서 굴삭기로 바닥을 푹 파놓은 인공 범피 구간이다. 오른쪽 앞바퀴와 왼쪽 뒷바퀴가 눌리면서 차체를 비트는 코스다. 아무리 봐도 어딘가 닿을 깊이인데 디스커버리는 흔들거리며 의연하게 통과했다. 물론 바퀴는 이쪽저쪽 한 번씩 번갈아가며 떴다가 눌리기를 반복한다. 서스펜션 스트로크가 길어 쭉 늘어났다가도, 눌릴 때는 휠하우스 안으로 쑥 들어간다. 어릴 적 봤던 디스커버리2의 감동적인 휠트레블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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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스펜션이 쭉쭉 늘어난다


마지막 코스는 급격한 내리막 구간. ‘내리막이야 브레이크만 살살 조절하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제 오프로드에선 흙과 돌이 무너져 내려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물론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경사가 가장 심한 곳에 들어서자 여지없이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HDC(내리막 주행장치)의 반응이 꽤 재밌다. 미끄러지면 당연히 네 바퀴 모두에 제동이 걸릴 것 같았는데, 각 바퀴에 따로따로 제동을 걸며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내려왔다. 그저 바퀴를 멈추는 단순한 제동장치가 아니라 내리막 속도 유지 장치라고 불리는 이유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오프로드 체험 주행이 모두 끝났다. 시승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디스커버리는 오프로드에 지친 심신을 달래주듯 사뿐사뿐 달린다. 노면의 충격을 부드럽게 거르는 모습이 주행성능보다 승차감에 집중한 패밀리 SUV답다. 물론 유럽차답게 노면의 정보까진 거르지 않는다. 전문 오프로더가 온로드에서 불편하다는 선입견은 이제 디스커버리 앞에서는 옛말이다. 디스커버리엔 경직된 프레임 골격의 불쾌한 꿀렁거림도, 프레임과 차체 사이 고무 부시의 털털거림도 없다. 비싼 돈 들여 만든 알루미늄 모노코크 차체가 단단한 강성과 승차감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디스커버리는 여전했다. 어릴 적 동경했던 대륙을 건너고 사막에서 모래바람을 휘날리던 디스커버리의 매력은 그대로였다. 3세대로 바뀌며 프레임 골격과 리지드 액슬(양쪽 바퀴가 연결된 견고한 구동축)을 버렸고, 5세대로 바뀌며 각진 차체 디자인에서도 벗어났지만, 모험가 정신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 신형 디스커버리는 더 편하고, 세련되게 진화했으면서도 언제든 지붕에 타이어와 기름통을 얹고 모험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윤지수 기자 사진 재규어-랜드로버코리아, 윤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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