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오프로더, 설산에 오르다 - 지프 랭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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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EP WRANGLER RUBICON 4-DOOR
OFFROAD IN SNOW : 지프 랭글러


겨울의 끝자락, 지프 랭글러를 몰고 무작정 산속으로 향했다. 새하얀 눈밭을 휘젓고 다닐 오프로더는 당분간 접하지 못할 테니까. 예상대로 오랜 시간 발전을 거듭한 정교한 기술은 설산을 손쉽게 지배했고, 백색 카펫 위 위풍당당한 자취를 깊숙이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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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프 랭글러는 오프로드 SUV의 대명사다. 수십 년간 고집스럽게 지켜온 정체성을 필두로 세련된 차가 판치는 글로벌 SUV 시장 속에서도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탄탄함이 엿보이는 옹골찬 디자인과 그 어떤 험로도 가뿐히 돌파할 것만 같은 강력한 사륜구동 시스템은 이런 명성을 뒷받침하는 듬직한 하드웨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2말3초, 눈이 가시지 않은 첩첩산중에서 랭글러는 미끄럽고 불규칙한 노면 위를 활기차게 나아갔고, 그 어떤 난관 앞에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강인함을 드러냈다. 이 과정에서 차체에 튄 질퍽한 진흙은 자랑스러운 훈장 같았다. 감성과 기술이 한데 어우러진 시간 속에서 그 무엇과도 바꾸기 힘든 값진 경험을 만끽했다.

정통 오프로더, 설산에 오르다
산이 깊어질수록 눈도 깊어졌고 노면 폭 역시 좁아졌다. 운전석 왼쪽에는 아찔한 낭떠러지까지 펼쳐졌다. 조금 전까지 접했던 포장도로와 180도 다른 환경에 자연스레 온 신경이 곤두섰다. 뒷목이 뻣뻣해지고, ‘여길 왜 왔을까’ 하는 소심한 후회도 살짝 밀려왔다. 믿을 것은 내 자신과 지프 랭글러 뿐. 마음을 다잡고 신중을 다해 스티어링 휠과 가·감속 페달을 조작했다. 하지만 곧바로 난관에 봉착했다. 눈이 두툼하게 덮인 경사로에 발목이 잡힌 것. 가속 페달을 밟으면 밟을수록 뒷바퀴는 미친 듯이 헛돌았고, 엉덩이가 좌우로 요동쳤다. 순간 가슴이 턱 막히면서 동공이 확장됐다. 본능적으로 감속 페달을 깊숙이 밟았다.


시승차인 지프 랭글러 루비콘 4도어의 구동방식은 Rock-TracⓇ  파트타임 네바퀴굴림. 기어박스 좌측에 자리잡은 4WD 기어 시프트(2H-4H-N-4L)로 노면 상황에 알맞은 앞뒤 구동력 배분이 가능한데, 눈이 어느 정도 녹은 저고도 지역에서는 뒷바퀴로 모든 힘을 전달하는 2H로 주행이 가능했지만, 눈이 덜 녹은 산 중턱에서는 얘기가 달랐다. 4WD 기어 시프트를 4H로 바꿨다. 가드레일 하나 없는 낭떠러지를 옆에 두고 비장한 마음으로 가속 페달에 힘을 가했다. 손에 땀을 쥐는 절체절명의 시간. 랭글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가뿐하게 눈 덮인 경사로를 치고 올라갔다. 록트랙 트랜스퍼 케이스가 앞뒤로 50:50의 고정된 구동력을 전달하고, Tru-lokⓇ 디퍼렌셜이 그립을 잃은 바퀴의 반대 바퀴에 힘을 실어 접지력을 향상시킨 덕분이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온 몸을 지배하던 불안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스노 오프로드의 가장 큰 장애물인 미끄럼을 극복한 차는 보다 가파른 경사로도 거뜬히 주파했다. 눈은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운전에 운치를 더해주는 아름다운 배경요소일 뿐 두렵지 않았다. 중간 중간 맞닥뜨린 계곡은 즐거운 놀이터가 됐는데, 최대 76cm에 이르는 도하 가능 깊이를 무기삼아 시원하게 물살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지루할 틈 없이 산을 오르는 도중 오른쪽으로 나 있는 샛길로 꽤나 넓은 공터가 보였다. 망설임 없이 방향을 틀었다. 육중한 SUV지만 어찌 됐든 100% 후륜구동이 가능한 차가 아니던가. 잠시 외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화끈하게 놀아 볼 작정이었다.


4WD 기어 시프트를 2H로 옮기고 트랙션 컨트롤 시스템을 껐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V6 3.6L 가솔린 엔진과 5단 자동변속기로 이루어진 드라이브트레인(최고출력 284마력, 최대토크 35.4kg·m)을 거침없이 몰아붙였다. 운전석 너머로 과격한 엔진음이 들려오며 동시에 뒷바퀴가 만들어내는 시원한 눈보라가 사이드미러에 비쳤다. 순식간에 꽁무니는 바깥쪽으로 튀어나갔고, 스티어링 휠을 반대방향으로 감으며 최대한 자세를 잡으려 노력했다. 그러다가 박자를 놓쳐 제자리에서 빙글 돈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차의 솔직한 움직임에 절로 순수한 미소가 지어졌다. 어느새 눈밭은 진흙탕이 돼 있었고, 깨끗했던 차는 온데간데없었다. ‘덩치 큰 랠리카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4WD 기어 시프트를 다시 4H에 맞췄다. 전자장비가 개입하자 차는 다시 계산적인 움직임으로 새하얀 노면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역시나 안정적인 움직임을 드러내며 눈 덮인 산길을 오르내렸다. 참고로 시승 도중 4WD 기어 시프트의 4L은 사용할 일이 없었다. 바위 언덕이 끝없이 펼쳐진 곳이라면 모를까, 프론트 스웨이 바를 분리하고 엑슬 록을 통해 각 바퀴에 25%의 구동력을 배분하는 4L은 완만했던 시승 코스에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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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오프로더를 상징하는 트레일 레이티드 4×4 배지가 옆면에 부착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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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ROAD란 글자가 이 차의 성격을 명확히 드러낸다

이유 있는, 그리고 의도된 클래식
잠깐의 휴식을 위해 적당한 터에 자리를 잡고 쉘터와 체어, 그리고 테이블을 펼쳤다. 날씨는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쾌청했으며, 따스함을 머금은 햇살은 겨울의 끝을 알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신선함에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이 와중에 늠름한 랭글러의 자태는 계속해서 눈길을 사로잡았다. 2007년부터 이어온 디자인은 여전히 유효했고, 동글동글한 눈매와 일곱 가닥으로 나뉜 그릴이 지프의 순수 혈통임을 또렷이 드러내고 있었다. 나온 지 10년이 넘은 생김새지만 뚜렷한 방향성에 존재감은 확실했다. 시승차에는 시선을 사로잡는 신규 외장 컬러 하이퍼그린(Hypergreen)이 적용돼 전에 없던 화려함까지 챙겼다. 휠은 17인치 그레이 알루미늄 휠이 장착됐는데, 차 성격에 알맞은 245/75 R17 굿이어 온오프로드 타이어가 끼워져 멋과 기능을 모두 아우른다. 지붕에는 운전석과 동승석, 2열 및 트렁크공간으로 나눠지는 3피스 하드톱이 씌워져 있고, 기분에 따라 운전석 쪽만 열거나 혹은 전부를 개방할 수 있다. 개폐방식이 수동이라 혼자서 지붕을 열고 닫기가 힘들다는 점은 흠. 오픈에어링을 즐겨보고자 무턱대고 덤볐다가 빠른 포기를 맛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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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관과 마찬가지로 실내도 10년이 넘는 세월을 묵묵히 견뎌왔다. 3스포크 스티어링 휠과 계기판, 센터페시아 등 실내는 전반적으로 ‘클래식’을 머금고 있는데, 말이 좋아 클래식이지 확실히 세련미는 떨어진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태생적으로 오프로드를 뛰기 위해 만들어진 차이기에 외형의 화려함보다는 잦은 오염에 더 신경을 써야 했고, 오프로드를 다녀온 뒤 실내 곳곳에 묻은 흙먼지를 물로 말끔히 씻어낼 수 있도록 내부를 구성해야 했다. 이동형 카펫과 배수구가 그 증거. 컨셉트에 매우 충실한 차인 셈이다. 단조로운 실내 구성쯤은 과감히 용서된다. 그렇다고 아쉬운 면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오래된 만큼 지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몇 있다. 차의 정보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구식 계기판과 내비게이션 및 블루투스 기능이 빠진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이 대표적인 사례. 시승 도중 스마트폰이 터지지 않는 산속에서 GPS와 바로 연결되는 내비게이션의 부재가 뼈저리게 다가왔다. 그나마 상위 트림인 사하라에는 한국형 내비게이션이 지원된다. 이 외에 스포츠, 루비콘 2도어, 루비콘 4도어 트림은 스마트폰 내비게이션과 CD 데크 혹은 AUX 케이블을 사용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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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착이 가능한 금속 폴형 안테나가 지프 랭글러를 더욱 클래식하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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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부터 1945년까지 생산된 윌리스 MB를 시초로 삼고 있는 지프 랭글러


 

언제든 미끄러질 수 있는 스노 오프로드에서 매 순간 차분한 몸놀림을 자랑하고 여러 방면으로 운전의 즐거움을 선사한 지프 랭글러.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매력이 짙어지는 차는 실로 오랜만이다. 네 바퀴가 서로 뒤엉키는 드라마틱한 오프로드를 체험했으면 더 없이 좋았겠지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왜 지프 랭글러가 오랜 시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는지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뚜렷한 컨셉트에서 비롯된 감성과 기술이 10년이 넘는 세월 속에 녹아들었고,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산속이라 그런지 해가 평소보다 빨리 저물었다. 짐 정리를 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길을 서둘렀다.

 

문서우 기자 사진 최진호 협찬 버튼코리아(www.burt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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